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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현(영덕학사 이사·재경영덕군향우회 회장·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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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은 각기 다른 대학에서 서로 다른 전공을 공부하고 있다. 앞으로 사회에 나가면 공무원, 법조인, 기업인, 교수, 연구원, 기술자 등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바로 영덕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지금은 서울의 영덕학사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누구인가?” 정체성이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자신의 뿌리를 알고,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여러 정체성이 있다. 어느 가정의 자녀이기도 하고, 어느 대학의 학생이기도 하며, 사회에 나가면 각자의 직업을 가진 직업인이 된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정체성이 있다.
‘나는 영덕인이다.’ 나는 영덕인이라는 정체성이 우리에게 크게 세 가지를 준다고 생각한다. 자부심, 연대감, 책임감이다.
자부심은 고향의 역사를 아는 데서 시작된다. 자신의 고향이 어떤 곳인지 모른다면 고향에 대한 자부심을 갖기 어렵다. 반대로 고향의 역사와 선배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알게 되면 “나도 영덕 사람이다”라는 자부심이 생긴다. 그 자부심은 자신감으로 발전한다.
영덕은 나라가 어려울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앞장섰던 고장이다. 고려 말인 1382년경 축산항 일대에는 수군만호가 설치되어 동해안 방어를 담당했다. 조선시대에도 축산항 일대는 오랫동안 수군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최윤덕 장군과 관련된 왜구 격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임진왜란 때에도 영덕 지역에서는 왜적에 맞선 활동이 이어졌다. 구한말에는 평민 의병장으로 유명한 신돌석 장군이 영덕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켜 외세에 맞섰다. 6·25전쟁 때에는 수백 명의 젊은 학도병이 장사상륙작전에 참가하여 목숨을 걸고 싸웠다. 나라가 어려울 때 앞장섰던 사람들이 우리 고향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영덕은 단순히 동해안에 자리한 작은 농어촌이 아니다. 나라를 지켜온 호국의 고장이라는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오늘의 젊은 세대가 이러한 역사를 아는 것은 옛날 일을 자랑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 역사를 통해 “나에게도 저런 선배들의 정신이 이어지고 있다”는 자신감을 갖기 위해서다.
영덕에는 학문과 교육의 전통이 있다. 영덕, 특히 영해는 학문의 전통도 깊다. 고려 말의 대학자인 목은 이색 선생은 영해와 깊은 인연이 있다. 그의 아버지 이곡 선생이 영해에 장가들어 인연을 맺었고, 목은 역시 영해에서 태어나 자랐다. 목은 선생은 관어대에서 동해를 바라보며 ‘관어대부’를 남겼고, 이후 많은 선비들이 목은의 자취를 찾아 영해와 관어대를 찾았다. 조선시대에는 영해 창수에서 갈암 이현일이라는 큰 유학자가 배출되었다. 그의 형제와 후손들은 영남 남인의 유학을 계승했다. 이러한 학문의 전통은 오랫동안 영덕 사람들의 교육열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우리 부모 세대에는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도 “자식 공부만큼은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았다. 농사를 짓고 고기잡이를 하면서도 자녀들을 대구와 서울로 유학 보냈다. 오늘날 영덕의 젊은이들이 서울의 여러 대학에서 공부하고, 영덕학사에서 함께 생활하는 것도 어찌 보면 수백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영덕의 교육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일이다.
영덕의 발전에는 바다가 있었다. 우리 영덕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자산이 있다. 바로 바다다. 나는 젊은 시절 배를 타고 항해사와 선장으로 세계의 바다를 다녔다. 이후 대학에서 해상법을 연구하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평생을 바다와 함께 살아온 셈이다. 그래서 바다가 한 지역과 국가의 운명을 얼마나 크게 바꿀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1900년을 전후하여 동해안 수산업이 발전하면서 축산항과 강구항을 중심으로 활발한 경제활동이 이루어졌다. 농촌에서는 주로 추수기에 현금소득이 생겼지만 어촌에서는 매일 잡아온 수산물이 바로 현금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축산과 강구 등에는 상당한 경제력을 갖춘 사람들이 등장했고, 그 경제력은 다시 자녀 교육에 투자되었다. 자녀들을 대구와 서울로 유학 보내고 더 멀리 일본에 유학을 보낸 집안들도 있었다.
우리가 여기서 배워야 할 것은 단순히 “옛날 영덕이 잘살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선배들은 경제적 성과를 다음 세대의 교육과 인재 양성으로 연결했다. 바로 그 정신이 중요하다.
영덕인의 정신은 무엇인가. 나는 오랫동안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은 영덕 사람을 만났다. 그 과정에서 몇 가지 공통적인 장점을 느꼈다.
첫째는 성실함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하게 해내는 사람들이 많다. 둘째는 교육을 중시하는 정신이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아도 자식 공부만큼은 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셋째는 예의와 공동체를 중시하는 정신이다. 특히 영해를 중심으로 유학의 전통이 오랫동안 이어지면서 가정교육과 예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넷째는 강한 책임감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끝까지 책임지고 달성하려고 노력한다. 물론 “영덕 사람이 다른 지역 사람보다 우수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물려진 좋은 전통을 알고 그것을 오늘의 시대에 맞게 발전시키는 것이다.
성실함, 배움에 대한 열정, 정직함,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 나는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이어가야 할 영덕인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영덕학사는 단순한 기숙사가 아니다
그러면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영덕학사는 왜 만들어졌을까. 1990년대 영덕의 선배들은 한 가지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서울과 지방의 교육환경 격차가 커졌다. 영덕의 학생이 열심히 공부하여 서울의 대학에 입학하더라도 또 다른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에서 살 집이 필요했고 생활비도 필요했다. 선배들은 생각했다. “가정 형편 때문에 고향의 우수한 후배들이 꿈을 포기하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힘을 모아 후배들을 키우자.” 그것이 영덕학사의 출발이었다.
뜻있는 선배들이 모금운동을 벌였고, 김남수 선생님과 서분례 선생님 등이 큰 뜻을 보태셨으며, 박영호 이사장님을 비롯한 많은 선배들이 앞장섰다. 그 결과 서울 사직동에 영덕학사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나는 영덕학사를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선배 세대가 후배 세대의 미래를 위해 만든 영덕의 인재양성소.” 영덕학사는 잠을 자는 기숙사만이 아니다.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는 공간이다.
현재 영덕학사의 학생들은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의 도움을 받고 있다. 영덕학사의 10여 분 이사들은 매년 150만 원의 회비를 부담하고 있다. 일반적인 공익법인에서는 이사가 회의에 참석하면 거마비를 받는 경우도 있지만 영덕학사의 이사들은 오히려 자신의 돈을 내면서 후배들을 지원한다. 왜 그렇게 할까. 학생들에게 나중에 무엇인가를 받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 고향의 후배들이 잘되어야 한다.” 그 마음 하나라고 생각한다. 학생 한 사람이 학사에서 받는 경제적인 혜택도 적지 않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지금은 마음껏 도움을 받으라고 했다. 대신 10년 뒤, 20년 뒤 사회에서 자리를 잡았을 때는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꼭 돈으로 갚을 필요도 없다.
변호사가 된 선배는 후배에게 법률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기업에 취업한 선배는 취업을 준비하는 후배에게 자신의 경험을 알려줄 수 있다. 교수가 된 선배는 진학을 고민하는 학생에게 길을 알려줄 수 있다. 경제적 여유가 생긴 사람은 장학금을 낼 수도 있다. 선배의 도움 → 학사생의 성장 → 사회 진출 → 후배 지원 → 새로운 인재의 성장. 이러한 선순환이 만들어진다면 영덕학사는 50년을 넘어 100년을 이어갈 수 있다.
이제 후배가 선배를 돕기 시작했다. 내가 특히 기뻤던 일이 하나 있었다. 재경영덕군향우회에서는 고향 선후배들을 위한 스마트폰·AI 교육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