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사회/문화
[고향신문=조원영기자] 지난 3월 의성에서 시작돼 영덕까지 확산한 초대형 산불의 진화 과정에는 이름 없이 묵묵히 현장을 지킨 수많은 숨은 주역들이 있었다. 거대한 화마 속에서도 각자의 위치를 끝까지 지켜낸 이들이 있었기에 주민들의 삶의 터전과 산림을 지켜낼 수 있었다.
특히 3월 29일 오후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강구면 상직리 임도 일원에서 펼쳐진 13시간의 밤샘 진화 작전은 지역 주민과 산불진화대, 산림 관계자들의 완벽한 공조가 만들어낸 대표적인 현장으로 남았다. 당시 달산면에서 강구면 방향으로 번져오던 산불은 강풍을 타고 빠르게 확산되며 강구지역까지 위협했지만, 대원들은 사투 끝에 불길을 저지하며 더 큰 피해를 막아냈다.
3월 29일 오후 4시께 영덕군 지품면 용덕리에서 산불 진화 작업을 벌이던 대원들은 달산면 대지리 폐차장 맞은편 상직리 방향 산등성이에서 새로운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발견했다. 건조한 날씨와 강풍을 타고 또 다른 화선이 형성되고 있다는 판단이 내려졌고, 현장 지휘부는 즉시 대응에 나섰다. 자칫 달산면에서 강구면으로 산불이 넘어올 경우 강구지역 산림과 민가까지 위협할 수 있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빽빽한 산림과 험준한 산악지형 때문에 정확한 진입로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초기 대응이 늦어질 경우 대형 산불로 이어질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강구면 진화대 이종수 반장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상직리 지형을 누구보다 잘 아는 마을 새마을지도자를 찾아 현장 지휘부와 연결했고, 주민의 안내를 통해 진입 가능한 임도와 이동 경로를 신속하게 확보했다. 지리 정보가 확보되자 강구면·달산면·영덕읍 산불진화대가 상직리 임도 방향으로 즉시 출동했다.
하지만 현장에 도착한 뒤에도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진화 차량이 접근할 수 있는 곳에서 실제 불길이 번지는 화선까지는 길조차 없는 험한 산을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차량에서 화선까지 연결해야 할 진화 호스의 길이만 약 2km에 달했다. 대원들은 무거운 진화 호스를 어깨에 메고 가파른 산비탈과 잡목이 우거진 산길을 오르내리며 호스를 전개했다. 거센 산바람과 복잡한 지형으로 길을 찾는 데만 상당한 시간이 걸렸고, 호스를 모두 연결하는 데만 3시간 이상이 소요됐다. 어렵게 진화 준비를 마친 순간 또 다른 난관이 찾아왔다. 준비해 온 8.5㎜ 진화 호스가 모두 소진된 것이다.
밤 10시가 넘어서자 산불은 붉은 화염을 뿜으며 어둠에 잠긴 산을 집어삼킬 듯 번져갔다. 호스 부족으로 진화 작업이 중단될 위기에 놓이자 현장에서는 긴급 무전이 송신됐다. 마침 다른 구역에서 진화를 마치고 하산하던 군 진화대 김영수 대장이 무전을 듣고 여분의 진화 호스를 챙겨 곧바로 현장으로 향했고, 중단될 뻔했던 진화 작업은 다시 이어질 수 있었다.
자정을 넘기면서 각 읍·면 진화대의 유기적인 역할 분담은 더욱 빛을 발했다. 달산면 진화대 김진복 반장은 가파르고 좁은 임도에서 밤새 진화 차량을 안전하게 운용하며 최전선까지 안정적으로 물을 공급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차량을 운행하는 일은 긴장감의 연속이었다. 영덕읍 진화대 정재신 반장은 최전선으로 이어지는 호스에 물이 끊기지 않도록 수압을 유지하고 물 공급을 책임졌다. 화선에서 사투를 벌이는 대원들에게는 생명줄과도 같은 역할이었다.
여기에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선두에 서서 길을 안내한 달산면 윤병철 부반장과 김영수 대장, 당시 교육 파견 중이었지만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급히 복귀해 진화를 지원한 김정두 팀장을 비롯한 산림 관계자들의 협력이 더해졌다. 각자의 역할이 한 치의 오차 없이 맞물리면서 약 2km에 이르는 진화 호스가 완성됐고, 대원들은 마침내 달산에서 강구 방면으로 확산되던 불머리(화두)를 붙잡는 데 성공했다. 밤새 이어진 사투 끝에 화선 확산이 차단되면서 강구지역으로 번질 수 있었던 산불은 더 이상 확산되지 않았고, 최악의 상황을 막아낼 수 있었다.
당시 대원들에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체력이었다. 3월 29일은 산불 진화가 시작된 지 이미 닷새째였다. 대원들은 며칠째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채 험준한 산악지형을 오르내리며 산불과 싸우고 있었다. 체력은 이미 한계에 이르렀고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내 고장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 하나로 서로를 격려하며 밤을 버텼다.
현장에 있었던 대원들은 지금도 그날 밤을 생생히 기억한다. 한 대원은 "몸이 부서질 것 같았던 그날 밤은 숨이 막힐 만큼 긴박했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의 연속이었다"고 회상했다. 또 다른 대원은 "그날 밤 누구 하나라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거나 주민들의 길 안내가 없었더라면, 또 물 공급이 중단됐더라면 강구 방면으로 산불이 넘어가 대형 피해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컸다"며 "육체적 한계를 정신력으로 버티며 모두가 한마음으로 힘을 모았기에 불가능해 보였던 진화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번 영덕 산불 진화는 특정 개인의 영웅적인 활약만으로 이뤄진 결과가 아니었다. 지역 주민들의 신속한 협조와 읍·면 진화대의 유기적인 역할 분담, 산림 관계자들의 현장 지원,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대원들의 책임감이 하나로 모여 만들어낸 결과였다. 3월 29일 오후 4시부터 이튿날 새벽 5시까지 상직리 임도에서 이어진 13시간의 사투는 달산에서 강구로 향하던 화마를 막아낸 결정적인 현장이자, 극한의 재난 속에서도 지역 공동체가 하나 되어 주민의 생명과 삶의 터전을 지켜낸 협력의 기록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