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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향교>(영해면 성내리 예주8길14-5)
장하도다 동해의 솟은 아침 해
이상과 희망이 번쩍이도다
예주의 이름난 칠보산 밑에
기름진 옥야천리 앞에 열렸네
누구나 영해 초등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이 교가를 기억할 것이다, 세월이 흘러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들어온 추억은 잊히지 않는다. 이 교가를 떠올리며 한 겨울 영해향교에 이른다. 1960년대 이 향교에서 공부한 나의 추억이 마치 전생의 일처럼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러 잡지와 매체에 고향에 대한 글을 썼기로, 나의 유년기에 관한 글 중 『샘터』(1994년 6월호)에 기고한 「나의 동심을 찾아서」 의 부분을 옮긴다.
“ 어릴적에 나는 창훈(아명)이로 불렸고, 초등학교(56회)는 영해 향교에서 다녔다. 한국전쟁 이후 교실 부족으로 향교와 신관을 함께 사용하여 2학년 때 까지 향교에서 공부하고 3학년부터는 신관으로 내려갔다.
내가 공부하던 향교기둥에는 전쟁의 상흔으로 머리통만 한 포탄이 박혀 있었다. 이걸 빼면 건물이 무너진다고 해서 그냥 두었는데, 우리는 포탄구멍에 낙서 쪽지를 구겨 넣고 빼내는 장난을 즐겼다.
향교 뒷산을 두고 비오는 날이면 허제비가 출현한다는 유언비어가 무성했지만, 용감한 동무들은 책보를 가슴에 지른 채 개구멍 같은 울타리를 잘도 타넘고 들었다. 또 어울려 참꽃(진달래)을 실컷 따먹느라 입술이 파래졌었다.
겁 많고 병약했던 내게 유일한 구원이 있었으니 1학년 때 받은 통지표였다.
‘창훈이는 미술과에 취미를 갖고 있습니다. 자주 보살펴 주십시오. 1964.2.25 담임 황삼복’ 이라고 쓴 통지표. 나는 몽땅 크레용으로 무척 열심히 그림을 그렸고, 그린 것은 어김없이 교실 뒤편에 걸렸다. 다른 과목에 취미를 갖지 못해 오로지 혼자 그림을 그리고 먹을 갈아 습자(서예)도 했다. 신문지에 종일 쓴 붓글씨가 변소에 가득하여 용변을 보고 나면 엉덩이에 시꺼멓게 먹이 묻어났다.”
고향에 올 때 마다 들리는 향교는 나의 샘과 뿌리로 인식된다. 작가가 되기 이전 순수했던 자신을 돌아보고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다짐의 증표요, 현장인 까닭이다.
다시 찾은 향교는 그동안의 변화를 보여준다. 예전에 없던 대성전(大成殿)과 내삼문(內三門), 동(東),서무(西廡)가 들어서고 담장너머의 관리사(전사청)도 생겼다. 2층 누각이 입구인 태화루(太和樓) 앞의 동(東),서재(西齋)는 당시 서재가 교실이었고 동재는 교사의 숙소로 사용하였다. 그 앞마당에는 향나무는 사라졌다.
영해향교는 고려시대인 1346년에 창건된 후 1529년(중종 24년)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현재의 모습은 2009년에 경사지에 건립하는 향교의 예를 따라 대성전을 명륜당(明倫堂) 뒤에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 방식으로 중수하고 건립하였다. 대성전에 5성(五聖), 동, 서무에 송조2현(宋朝二賢)과 우리나라의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향교 전경을 그리며 만난 노거수 회화나무는 선비나무로 알려져 있기에 서원이나 향교에 주로 심는데 이곳도 예외가 아니다. 향교 주변의 대숲과 소나무도 세한삼우(歲寒三友)에 드니 선비정신을 기린다. 그 뒤로는 활엽수가 동산을 이루며 원경의 산자락은 모두 소나무숲이다. 한편 회화나무 건너편의 방지와 육각정은 예전의 자연연못을 새롭게 조성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