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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고

<영덕의 빛과 바람> 이호신 화백의 그림순례(2)

고향신문 기자 입력 2026.02.09 11:21 수정 2026.02.09 11:34

2. 영해향교(寧海鄕校), 경수당(慶壽堂), 경수당 향나무


이호신 화백의 그림순례(2)


<영해향교>(영해면 성내리 예주8길14-5)


장하도다 동해의 솟은 아침 해
이상과 희망이 번쩍이도다
예주의 이름난 칠보산 밑에
기름진 옥야천리 앞에 열렸네

누구나 영해 초등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이 교가를 기억할 것이다, 세월이 흘러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들어온 추억은 잊히지 않는다. 이 교가를 떠올리며 한 겨울 영해향교에 이른다. 1960년대 이 향교에서 공부한 나의 추억이 마치 전생의 일처럼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러 잡지와 매체에 고향에 대한 글을 썼기로, 나의 유년기에 관한 글 중 『샘터』(1994년 6월호)에 기고한 「나의 동심을 찾아서」 의 부분을 옮긴다.

“ 어릴적에 나는 창훈(아명)이로 불렸고, 초등학교(56회)는 영해 향교에서 다녔다. 한국전쟁 이후 교실 부족으로 향교와 신관을 함께 사용하여 2학년 때 까지 향교에서 공부하고 3학년부터는 신관으로 내려갔다.
내가 공부하던 향교기둥에는 전쟁의 상흔으로 머리통만 한 포탄이 박혀 있었다. 이걸 빼면 건물이 무너진다고 해서 그냥 두었는데, 우리는 포탄구멍에 낙서 쪽지를 구겨 넣고 빼내는 장난을 즐겼다.
향교 뒷산을 두고 비오는 날이면 허제비가 출현한다는 유언비어가 무성했지만, 용감한 동무들은 책보를 가슴에 지른 채 개구멍 같은 울타리를 잘도 타넘고 들었다. 또 어울려 참꽃(진달래)을 실컷 따먹느라 입술이 파래졌었다.
겁 많고 병약했던 내게 유일한 구원이 있었으니 1학년 때 받은 통지표였다.
‘창훈이는 미술과에 취미를 갖고 있습니다. 자주 보살펴 주십시오. 1964.2.25 담임 황삼복’ 이라고 쓴 통지표. 나는 몽땅 크레용으로 무척 열심히 그림을 그렸고, 그린 것은 어김없이 교실 뒤편에 걸렸다. 다른 과목에 취미를 갖지 못해 오로지 혼자 그림을 그리고 먹을 갈아 습자(서예)도 했다. 신문지에 종일 쓴 붓글씨가 변소에 가득하여 용변을 보고 나면 엉덩이에 시꺼멓게 먹이 묻어났다.”

고향에 올 때 마다 들리는 향교는 나의 샘과 뿌리로 인식된다. 작가가 되기 이전 순수했던 자신을 돌아보고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다짐의 증표요, 현장인 까닭이다.
다시 찾은 향교는 그동안의 변화를 보여준다. 예전에 없던 대성전(大成殿)과 내삼문(內三門), 동(東),서무(西廡)가 들어서고 담장너머의 관리사(전사청)도 생겼다. 2층 누각이 입구인 태화루(太和樓) 앞의 동(東),서재(西齋)는 당시 서재가 교실이었고 동재는 교사의 숙소로 사용하였다. 그 앞마당에는 향나무는 사라졌다.
영해향교는 고려시대인 1346년에 창건된 후 1529년(중종 24년)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현재의 모습은 2009년에 경사지에 건립하는 향교의 예를 따라 대성전을 명륜당(明倫堂) 뒤에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 방식으로 중수하고 건립하였다. 대성전에 5성(五聖), 동, 서무에 송조2현(宋朝二賢)과 우리나라의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향교 전경을 그리며 만난 노거수 회화나무는 선비나무로 알려져 있기에 서원이나 향교에 주로 심는데 이곳도 예외가 아니다. 향교 주변의 대숲과 소나무도 세한삼우(歲寒三友)에 드니 선비정신을 기린다. 그 뒤로는 활엽수가 동산을 이루며 원경의 산자락은 모두 소나무숲이다. 한편 회화나무 건너편의 방지와 육각정은 예전의 자연연못을 새롭게 조성한 것이다.

마침 이곳의 전교(典敎) 박삼락(朴三洛, 1947년생) 선생을 뵈오니 오랜 기간 공직생활을 마치고 지난해(2025년)에 중책을 맡았다고 한다. 첫 인상으로 키가 훤칠하고 후덕한 풍모를 지니셨다. 그로부터 향교의 정기적인 제향(춘향, 추향제) 이야기와 오늘의 사정을 들었다. 향교의 활용으로 전통혼례, 노인들을 위한 잔치 기로연(耆老宴), 고등학생 성년식, 그리고 인성교육을 수시로 한다고 한다.
바라건대 좀 더 개방하여 680년 역사 교육기관의 향교가 역할이 있기를 기대한다. 거듭 시대성에 부합하며 지속적인 가치를 이어가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경수당> <경수당 향나무> (영해면 원구길 28-13)


이제 원구리로 가는 길. ‘원구전통마을’로 지정된 지역이다. 원구는 외가로 어릴 적 포플러나무 신작로를 따라 개울 물소리 들으며 영해 집에서 한없이 걸었던 추억이다. 외할머니 품이 그리워 갔다가 밤새 부엉이와 개구리 울음소리에 하얗게 밤을 밝혔던 기억이 아슴푸레하다.
이제 10년 전 (2016) 화첩을 들고 다시 찾은 곳으로 경수당종택(慶壽堂宗宅)이다. 경북 유형문화재로 지정(1997.9.29)된 종택은 조선중기 무신이자 임진왜란 때 활약한 박세순(朴世淳, 1539~1621)이 건립했다. 1570년(선조 3)에 약 99칸의 저택이었으나 1668년(현종 9)에 화재를 당했고, 1713년(숙종 39)에 복원 후 오늘에 이른다.
건물형태로 정침(正寢: 중심공간인 안채)은 정면 7칸 측면 6칸이고 ㅁ자형 구조이다. 대청은 앞면 3칸 규모로 사랑채 역할을 하며 안채를 향한 3문과 사랑채의 일각문이 있다. 현판 ‘慶壽堂(경수당)’은 퇴계 이황의 글씨로 원본은 국학진흥원에 소장되어 있다.
후원의 거대한 향나무가 경수당의 명물이다. 전해 오기로 박세순이 울릉도에서 구해 옮겨 심었다고 하며 수령 700년에 이른다고 한다. 높이 6m, 가슴높이둘레 3m로 수세가 양호하며 경상북도 기념물 제 124호로 지정되어 있다.

후원을 살펴보니 향나무를 바라보는 잘생긴 배롱나무, 연못주변의 반송들이 운치 있다. 마당의 조경으로 꽃나무와 소나무들이 다양하고 장독대와 화장실도 낮은 담으로 둘러 멋스럽다. 그리고 안채에서 연결된 8각형 분합문(불발기창)은 사대부 집안의 문화수준을 가늠하게 한다.

예전에 만났던 박응대(朴應大)16대 종손은 지난해(2025년) 타계하여 대신 종부 이명자(1952년생)여사를 만나 지난 이야기를 듣는다. 대구에서 27살 때 시집 온 종부는 근 반세기를 보내며 2녀1남을 낳고 잘 키웠다. 종부의 인상은 나이에 비해 젊고 나름 기품과 우아함이 있다. 전통한옥의 보전과 이미지를 위해 주방도 지나치지 않게 꾸미고 전등 하나도 신경 쓰며 달았다고 한다. 한겨울에 화첩을 들고 사생하는 길손에서 차를 대접해 주며 후원의 향나무 사연을 들려준다.

”저 향나무가 잘못될까봐 늘 신경을 씁니다. 예전부터 온 마을 제사 때 잔가지를 잘라서 향을 제공했지요. 그 공덕으로 인사 받고 지금껏 집안이 무탈하게 지내 온 것 같아요”

순간 최근에 읽었던 황석영의 『할매』가 떠오른다. 군산의 늙은 팽나무 한 그루를 통해 마을의 역사와 현실을 반추하는 이야기다.

“팽나무는 겨우내 봄의 꿈을 꾸며 잠들었다. 그러한 겨울이 백번 지나가고 다시 백번 쯤 지나 나무의 속내에는 이 백 개 넘는 나이테가 겹겹으로 쌓였다... 나보다 먼저 있고 나중에 없어질 할매여 내가 먼저 없어지네... 이 나무가 통과한 육백년이라는 시간은 물론 사람이 정한 시간일 뿐이며, 하늘의 해와 달과 별 그리고 바다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구분되지 않는 흐름 가운데 있다”

내가 문화유산과 더불어 자연유산의 중대성을 누누이 강조하고 그림으로 발표 해온 까닭도 위의 글과 상통한다. 이른바 자연유산은 생태는 물론 인문학적 가치와 자연의 순리를 통해 역사를 증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조들의 삶과 애환이 깃든 뿌리 깊은 나무를 통해 오늘의 삶을 직시하고 감사하는 일이다.
나는 한겨울에도 푸르른 향나무에 합장하고 마침내 붓을 들었다. 이 땅을 지켜 온 세월과 시련 속에도 여전히 건장한 모습에 절 올리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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