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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창식 고향신문 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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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성씨는 단순한 혈연공동체를 넘어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정신적 가치를 담고 있는 민족사의 한 축이다. 그 가운데 영해박씨(寧海朴氏)는 신라 충신 박제상을 중시조로 받들며 충(忠)과 의(義), 효(孝)의 전통을 계승해 온 명문 가문으로 평가받고 있다.
영해박씨의 본관인 영해는 예로부터 동해안의 요충지로서 역사와 문화가 융성하였던 지역이다.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수많은 학자와 충신, 효자를 배출한 이곳은 오늘날까지도 유서 깊은 전통과 문화를 간직하고 있으며, 선조들의 발자취가 살아 숨 쉬는 역사문화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영해박씨는 문중 전승과 족보에서 시조는 신라 시기 충신 박제상(朴堤上)으로 신라 귀족 계통을 거쳐 충신 가문의 정신적 뿌리를 형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박제상은 영해박씨 후손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인물로서 충절의 상징이자 가문의 표상으로 추앙받고 있다.
신라 눌지왕 때 국운이 위태롭던 시기, 왕족인 미사흔은 고구려에, 복호는 왜국에 볼모로 잡혀 있었다. 왕은 국가의 안정을 위해 이들을 귀환시킬 충신을 찾았고, 이에 나선 인물이 바로 박제상이었다.
박제상은 먼저 고구려에 들어가 미사흔을 구출하였고, 이어 왜국으로 건너가 복호를 탈출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왜왕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왜왕은 회유와 협박으로 신라를 배반할 것을 요구했지만 그는 끝까지 신라 신하로서의 절개를 지키며 굴복하지 않았다.
결국 박제상은 혹독한 형벌과 고문 끝에 순국하였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신라를 구한 충절의 상징으로 남았고, 후세는 그를 충신의 표본으로 기려 왔다. 영해박씨 가문은 이러한 박제상의 충의정신을 가문의 근본 가치로 삼아 대대로 계승해 왔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이르러 영해박씨 가문에서는 문과 급제자와 학자, 지방 행정을 담당한 관리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또한 향촌사회에서는 학문과 예절을 숭상하고 효행을 실천하는 가풍으로 명성을 이어왔다. 이러한 전통은 가문을 넘어 지역사회의 발전과 문화 형성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영해박씨 가문에서 중요하게 전해지는 정신이 바로 "거무역(居無易)"이다. 거무역은 일반적으로 "어떠한 위치에 있더라도 마음과 뜻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는 세상이 변하고 환경이 달라져도 올바른 도리와 신념을 지키며 살아가라는 가르침이다.
거무역은 단순히 뜻을 바꾸지 않는다는 의미를 넘어 어떠한 상황에서도 도리를 지키고 책임을 다하는 삶의 자세를 의미한다. 이러한 정신은 왜왕의 회유와 협박 앞에서도 신라 신하로서의 절개를 지킨 박제상의 삶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신하로서의 도리를 바꾸지 않았고 국가에 대한 충성을 저버리지 않았다. 부귀영화와 생명을 맞바꾸라는 유혹에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그의 정신은 곧 거무역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영해박씨 후손들이 강조하는 충효사상 역시 이러한 거무역 정신에서 비롯된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이웃과 사회를 위해 봉사하며 국가와 공동체를 위해 책임을 다하는 삶이야말로 선조들이 물려준 정신적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