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하고 지친 한 시인이 있다
세파에 떠밀리며 치열하게 투쟁하고
생존경쟁에 시달린 심신
축 늘어진 어깨 위에 한 잎 남은 잎새처럼
퇴색된 세월이 내려앉는다
등 뒤로 흘러 보낸 시간 속에
먹빛 같던 검은 머리는 은빛으로 물들고
돌아보니 왔던 길은 희미하며
시야엔 갈 길이 또렷한데
칠 부 능선을 세 발짝 넘어서서 배회한다
언제 여기까지 왔을까?
날아갈 듯이 달려왔나 보다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고
애써 자위를 해봐도
두 손에 잡히는 것 하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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