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유치에 너나없이 앞장서는 일은 바람직하지만, 그 취지가 정치적으로 비칠 때 유치운동은 군민 신뢰를 잃고 오히려 더 큰 어려움에 놓일 수 있다.
영덕에서 원전 유치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지역 소멸 위기와 경제 침체를 극복하려는 절박감에서 나왔다. 인구 감소, 일자리 부족, 지역 상권 위축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원전 유치는 지역 발전의 한 방안으로 논의돼 왔다. 그런 만큼 원전 유치 운동은 특정 정치 세력의 이해가 아니라 군민 전체의 미래를 기준으로 추진돼야 한다.
문제는 원전 유치라는 공적 의제가 선거 국면과 맞물려 특정 후보나 특정 진영의 정치적 행사로 비칠 때다. 원전 유치에 힘을 보태는 일 자체는 필요하다. 그러나 추진 과정이 투명하지 않거나 기존 논의 구조를 배제한 채 진행된다면 군민은 이를 순수한 지역 발전 운동이 아니라 정치적 동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오는 5월 6일 오후 2시 영덕군청 마당에서 열릴 예정인 ‘원전 유치를 위한 군민 화합 촉구대회’가 논란의 중심에 선 이유도 여기에 있다. 행사 포스터에는 “영덕의 미래, 군민 손으로”, “뭉치자 군민, 지키자 우리 미래”라는 구호가 담겼다. 또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역의 분열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 “선거는 공정하게 치러지고 위법 사항은 사법 절차에 맡기되 영덕군민은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취지의 내용도 포함됐다.
행사 주최는 ‘원전유치를 위한 영덕 청년연합회’로 표기됐다. 그러나 지역에서는 행사 추진 배경을 두고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그동안 원전 유치 활동을 주도해온 범영덕원전유치위원회와 사전 협의가 없었다는 점이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범영덕원전유치위원회는 그동안 영덕 원전 유치를 위해 활동해온 지역 단체다. 그런데 기존 위원회와 충분한 논의 없이 새로운 청년 조직 명의로 대규모 행사가 추진되면서, 원전 유치 운동의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이 불거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복수의 지역 관계자들은 조주홍 후보 캠프에 청년회의소, 4-H 등 일부 청년 조직 인사들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이번 행사가 선거 국면의 여론 전환용 행사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한 지역 정치권 관계자는 “연일 제기되는 선거 의혹으로 지역 여론이 악화하자 원전 유치라는 대형 현안을 앞세워 지지 세력을 결집하려는 것 아니냐는 시각이 있다”며 “원전 유치는 영덕의 미래가 걸린 문제인데 특정 후보의 정치적 방패가 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기존 범영덕원전유치위원회를 배제한 채 새 조직을 앞세우는 것은 향후 원전 유치 운동의 주도권을 특정 세력이 가져가려는 포석으로 보일 수 있다”며 “지역 화합을 말하면서 또 다른 분열을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원전 유치는 영덕군의 산업 구조와 재정, 인구 정책, 지역 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다. 그만큼 공론화 과정은 투명해야 한다. 정치적 중립성도 지켜져야 한다. 특정 후보나 특정 세력이 선거 국면에서 이를 전면에 내세울 경우 원전 유치 논의 자체가 정쟁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
지역 원로 한 명은 “원전 유치는 영덕군민 전체가 판단할 문제이지 특정 후보나 정치 세력의 전유물이 아니다”며 “정치적 이해관계가 앞서면 찬반을 떠나 지역 공동체의 신뢰가 무너진다”고 말했다.
범영덕원전유치위원회 관계자도 불편한 기류를 숨기지 않았다. 그는 “그동안 원전 유치를 위해 활동해온 위원회와 아무런 상의 없이 행사가 추진되는 데 유감을 표한다”며 “원전 유치 운동이 선거에 이용되는 일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향후 공식 입장을 내고 대응 방안을 논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군민 화합은 정치적 수사로 이뤄지지 않는다. 군민이 신뢰할 수 있는 방식으로 추진될 때 가능하다. 행사 하나로 여론을 모으려 하기보다 누가, 왜, 어떤 절차로 원전 유치 운동을 이끄는지 먼저 밝혀야 한다. 재원과 참여 단체, 의사 결정 과정도 공개돼야 한다. 그래야 불필요한 오해를 줄이고 원전 유치 논의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지금 영덕에 필요한 것은 정치적 원전 유치 운동이 아니라 신뢰받는 원전 유치 운동이다. 원전 유치에 앞장서는 모든 세력은 선거의 유불리를 내려놓아야 한다. 군민의 이름을 빌려 정치적 목적을 관철하려는 시도는 지역의 미래를 돕는 일이 아니라 해치는 일이다.
원전 유치가 성공하려면 먼저 군민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신뢰 없는 유치운동은 오래가지 못한다. 정치적 의심을 받는 운동은 더 멀리 나아갈 수 없다. 영덕의 미래를 위한 원전 유치라면, 그 출발점은 정치가 아니라 군민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