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오피니언
칼럼
|
|
이제는 <원구전통마을>의 입간판이 세월의 멀미를 뒤로하고 현실을 목도하게 한다. 먼저 마을 진입로의 무성한 느티나무 열 그루를 만나니 동제(洞祭)를 지내는 장소이다. 집성촌이 아닌 각성바지로 영양남씨(英陽南氏), 무안박씨(務安朴氏), 대흥백씨(大興白氏) 중심으로 500년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곳 동제 제관은 세 성씨가 돌아가며 맡고 있으며 이농현상에 비해 젊은 귀촌인이 는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한편 여린 손으로 철봉에 매달리던 원구초등학교는 폐교되었고, 외갓집은 흔적 없이 사라져 온통 대추나무밭이 되었다. 당시 외할아버지(김창락)는 마을의 유일한 한의(韓醫)로서 신망이 두터웠으며 외삼촌들은 이곳에서 성장하였다. 내 기억에도 둘째 외삼촌 혼례식을 마당에서 본 기억이 난다. 6.25 전란 때 북에서 내려와 원구에 정착한 외가는 나에게 어린 시절 추억의 샘이요, 둥지인 것이다.
|
|
|
|
|
난고는 원구에서 태어나 진사시에 입격하고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 휘하에서 활약한 인물로 광산서원(光山書院)에 제향 된 인물이다. 난고의 후손에 대소과 26명이 배출된 긍지 속에 우국 정신으로 가문의 전통을 이어 왔다. 18대 동안 종손이 한 번도 끊어지지 않고 이 터전을 지켜온 것이다.
뜨락에는 선조(先祖)가 심은 목백일홍(배롱나무)을 기념하는 표석이 있고 고사(枯死)한 원목에서 나온 손자목이 다홍빛으로 환하다. 텃밭의 모과나무는 종손이 각별히 아끼며 손질하여 결실의 가을을 맞이하고 있다.
이제 여러 건물 사생으로 종가 정침(正寢)을 마주하니 “영해 사람이란 뜻의” 현판 ‘寧窩’(영와)와 ‘靑氈世家’(청전세가)가 나란히 걸렸다. 청전은 푸른색 담요로 꾸준히 벼슬을 해 온 집안이란 뜻을 담고 있다. 중국 산동성의 서예가 진경교(陳更橋)의 글씨라고 안내하는 남소장이 말한다. 오늘이 마침 조부 제사라 분주한 시간에 종부(최윤영,78세)가 빨래를 거두는 모습이며, 유일하게 초가인 뒷간(화장실)이 인상적이다.
한편 큰 사당 대묘(大廟)에는 난고선생불천위(蘭皐先生不遷位)와 함께 고조(高祖), 증조(曾祖), 조부(祖父), 부(父) 신주까지 4代를 모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특별한 것은 이곳의 별묘(別廟)로 ‘遞遷位別廟’(체천위별묘)의 편액이 걸려있다.
내용인즉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새로운 종손의 취임식을 거행하는데 이를 길사(吉祀)라고 한다. 길사를 지내면 아버지의 고조부는 신임 종손에게는 5대조가 되어 신주를 산소에 묻는다. 그러나 5대조의 자손 중에 손자나 증손자가 살아 있으면, 이분의 신주를 산소에 묻지 않고 체천위 별묘로 옮겨서 모시고, 그 분의 손자나 증손자가 제사를 받들었다.
다른 하나의 별묘는 한 집안에 불천위가 두 분인 경우, 별도로 모신 불천위 사당을 별묘라고 부른다. 다른 지역으로 안동 하회의 양진당(養眞堂), 풍산 오미동의 허백당(虛白堂), 대구 옻골의 백불암(百弗庵), 상주의 우복당(愚伏堂)에는 두 분의 불천위를 모시고 있다.
|
|
지형적으로 난고종택은 동쪽의 상대산을 바라보고 앉았다. 남쪽의 용당산과 서쪽의 중구봉, 그리고 북쪽으로 원구들과 인량리가 보인다. 이 너른 들판의 풍요가 가솔과 가문의 영예를 잇게 했다고 여겨진다.
이번 여정을 함께한 영해 출신 김재열 선생(전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총장, 전 경기도박물관장, 전 호암미술관부관장)에게 느낌을 물으니 한마디로 난고종택의 이미지를 정리해준다. “조선의 백자처럼 개결한 선비의 기품이 흐르는 건축 공간”이라고.
|
|
이 상의당은 조선 숙종(1674~1720) 때 백훤(白暄), 백돈(白暾) 형제가 선조인 상의당(尙義堂) 백충언(白忠彦,1538~1609)을 기리며 지은 건물이다. 이후 후손 백기동(白基東)이 별당으로 쓰기도 했다.
현재의 건물은 1866년에 중수한 것이다.
백충언은 대흥백씨 영해 입향조인 백견(白堅)의 9세손으로 임진왜란 때 무신으로 선조를 호위한 공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책봉되었다. 그를 기리는 건축이 오늘날 백씨 가문의 상징적 건축 유산으로 남은 까닭이 전해 온다.
|
|
|
한편 ‘의(義)를 숭상(崇尙)하는 집’이라는 현판 ‘尙義堂’(상의당)이 문기어린 예서(隸書)로 눈길을 끈다. 운상씨가 조사해 보니 구한말의 서예가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 1835~1919)의 필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 소견으론 그의 글씨체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작가를 떠나 미감의 멋은 객관적으로 유효하다.
대저 집이란 무엇인가? 주거환경이 인간의 성정(性情)에 미치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옛 사람들은 큰 의미를 부여하였다. 다만 그것이 부(富)의 축적과 가문의 명예로 건축이 존재한다면 의미는 박약하다. 다행이 원구의 한옥은 나라를 위한 선조들의 얼이 서린 건축이기에 다행스럽다. 실상 국가가 없는데 가문이 무슨 소용 있으랴.
현재 진행 중인 세계적인 설치작가 서도호 전시 (국립현대미술관, 8.27~2027.2.9)는 집을 주제로 펼쳐지고 있다. 그는 부모와 살던 집의 추억과 형상을 재발견하여 작품으로 전한다.
“나에게 집은 자신의 연장선이다. 말하자면 나는 집에서 자아를 느낀다. 한국에서 살던 한옥, 미국에서 살던 아파트먼트 등 다양한 주거 공간을 작품으로 만들고 있는 것도 그래서다. 또한 집은 우리가 삶의 여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나에게 중요하다.” (『20세기 한국 미술의 길』 목수현 지음,183쪽 사회평론아카데미,2026년)
인간이 만든 집은 주거공간을 너머 삶의 원천과 가치를 담는 그릇이라고 여긴다. 생활과 영혼이 깃든 곳이다. 그리고 그 의미가 깊을수록 누대로 전해지고 문화유산이 된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