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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둥지를 튼 축산항은 과거 일제에 의해 개항되었고, 1971년 12월 21일 국가어항으로 지정되었다. 일제가 어족자원 약탈의 편리를 위해 조성한 역사를 지닌 역설적인 항구이다. 하지만 2024년 축산항 개항 100주년을 맞이한 감회는 남달리 특별하였다.
이곳의 축산초등학교 출신인 김인현 고려대 명예교수(법학전문대학원/선장)를 만나 축산항의 사연을 듣는다. 그의 조부는 일본에서 일군 운수업을 정리하고 해방 때 현금 대신 어선 한 척을 사왔다. 그 배로 수산업에 성공해 어선 3척(삼화호, 삼중호, 삼광호)를 거느린 선주가 되었다. 손자인 김교수의 말인 즉 한국해양대학교 항해학과를 졸업하고 선장이 된 내력이다. 그의 저서 (『바다와 배, 그리고 별』 법문사, 2024년)에서 "어선은 아랫대에도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주었다. 특히 해상법을 전공하는 손자인 나에게 큰 도움이 됐다. 해상법은 선박이 연구대상이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어선을 경험했으니 친숙하고 항상 자신감이 묻어난다"(42~43쪽) 선대의 유지를 받들어 공인이 된 그의 생가를 찾으니 구순을 넘은 어머니가 아들을 반긴다. 죽도산 아래 웅장한 해송이 집안을 지켜보고 있는 뜨락이 밝고도 맑다.
이제 축산항 전경을 보기위해 죽도산 전망대로 김교수, 박은정 축산면장 일행과 올랐다. 5층에 이르러 바라보는 시야는 사방이 여러 폭의 그림으로 들어온다. 동쪽 바다와 수평선, 서쪽엔 말미산과 현수교 해안이, 북쪽의 대소산 봉수대, 그 산자락 해안으로 대진리와 고래불해수욕장이 원경으로 드러난다. 그 너머에 풍력단지가 아스라하다. 아주 맑은 날은 포항의 호미곶에서 후포에 이르는 풍광도 스친다고 한다.
무엇보다 나는 죽도산 발밑에서부터 항구건너 대소산 봉수대까지 한 눈에 펼쳐지는 형세와 풍광에 화첩부터 열었다. 대개 여러 장면을 화면으로 옮기려면 분할과 압축의 재구성이 필요한데 한 눈에 마을과 축산항이 다 들어온다. 마치 병풍처럼 펼쳐진 광경이다. 예전에는 죽도산이 죽도(竹島)라는 섬이었고, 이곳의 등대로 바다의 길을 잃지 않고 배가 항구로 돌아오는 역할을 하였다.
봉수대 중앙부는 역시 석축으로 된 연통(굴뚝)이 구축되어 있다. 연통의 외형은 단경 10m, 장경 12m에 높이가 약 3m되는 원통형이며, 구조는 대소형의 할석을 이용하여 두께 1.5m 되는 석축벽으로 둘러 있다. 현재 영해읍에서 동남쪽으로 직선거리 3㎞, 축산항(丑山港)에서 서북쪽으로 약 1㎞, 해안으로부터도 약 1㎞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대소산 봉수대를 중심으로 보았을 때 남쪽으로는 별반봉수대(別畔 烽燧臺), 북으로는 평해(平海)의 후리산봉수대(厚里山烽燧臺), 서로는 광산 봉수대(廣山烽燧臺)를 거쳐 진보(眞寶)의 남각산 봉수대(南角山烽燧臺)로 이어지도록 되어 있었다. 이들 여러 봉수대 가운데 대소산 봉수대가 가장 형태가 뚜렷하게 남아 있어 이 지역의 조선시대 통신수단을 알게 한다. 또한 국토를 지키는 호국의 터전이요, 눈이었다. 나는 봉수대의 지형과 함께 축산항, 죽도산과 바다의 등대를 한 화폭에 담았다. 그리고 시대와 바다의 경계를 허물고 나르는 갈매기를 불러 들였다.
산을 내려와 마을의 동신목(洞神木)을 찾으니 수백 년 된 팽나무에 금줄이 쳐있다. 얼마나 많은 사연과 바닷길의 무사고를 빌었을까? 삼짇날 (음력 3월 3일)과 중양절(重陽節 음력 9월 9일) 자정에 동신목에 제를 올린다고 한다. 그 옆 산길로 오르자 이곳에 신라 경덕왕 때 정착한 영양(英陽) 남씨(南氏)의 비석들이 즐비하다. 또 그 분파로 영양(英陽) 김씨(金氏) 시조공(始祖公)이 된 사적(事績)으로 유허비각(遺墟碑閣)이 윗 동산에 소나무와 대숲에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도 어부들은 깔깔대고 걸쭉한 농을 주고받으며 일을 한다. 때 마침 립스틱 짙게 바른 다방아가씨가 다가와 배달커피를 나누어 주자 잠시 일손을 놓고 길손에게 너스레를 피운다.
"아 우리를 그리면 모델비는 얼마나 준다요" 하기에 "주민을 대표하는 분들을 골라 신문에 소개하니 광고비를 내셔야지요" 하였더니 엄지척 하며 흐드러지게 웃는다.
잠시 후 부두가의 가게를 둘러보니 왠 다방이 이리도 많은지 신기하여 화첩에 적었다. 현대다방/ 약속다방/고려다방/ 동양다방/ 국제다방/ 청파다방/ 대박다방/ 우향다방/ 죽도다방/ 88다방/ 솔잎다방 등이 있다. 예전 항구가 성할 때는 더 많았다니 가히 축산항은 다방의 현대사로 기록할 만하다. 어촌의 풍속도 속에 기다림과 만남, 그리고 이별의 사연을 지닌 삶의 공간인 것이다.
한편 내 유년의 추억으로 아버지 손에 이끌려 가족들이 이곳 축산항에 와서 처음으로 자장면을 먹었던 기억이 마치 전생의 일만 같다. 그 때 '축산'이란 지명을 알았기에. 해서 두 서너 곳의 중화요리집을 찾아보았지만 시공(時空)의 한계를 느껴야 했다.
다음으로 영덕 축산항 기록집 「영덕의 보물선 축산항」(영덕문화관광재단, 2023년)에 실린 마을 주민 인터뷰의 인물을 직접 만나보고 싶어 졌다.
다음에 만난 김순남 해녀(79세)는 강원도 묵호에서 자랐지만 어부인 아버지를 따라 열다섯살에 축산항으로 왔다. 제주에서 온 해녀들의 도움을 받아 해녀가 되었다고 한다. 물질 말고도 선박에 걸린 로프나 그물을 제거하기 위해 배밑으로 들어가 줄을 자르는 일 등이 많았는데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남편의 사별에 재혼했으나 자식들이 다 잘 성장하여 고맙다는 해녀의 주름 깊은 얼굴이 인생의 훈장 같기만 하다.
들은바 1382년 왜구침입으로 영해성(예주성)과 축산성에 수군만호(水軍萬戶)를 설치한 성벽이 있다기에 수소문해 보니 박만출씨 (82세)댁 옥상 너머로 성벽이 즐비하다. 여러 학자들이 와서 사진을 찍고 간다는 성벽은 제대로 된 고증과 보존이 필요하다. 조선 숙종 19년(1674년)에 안용복(安龍福)이 축산을 통해서 울릉도와 독도를 확인했다고 『숙종실록』이 전하며, 1803년에 쌀 3만석이 배사고로 이곳에 수장되었다고 한다.
이 같은 파란의 역사 속에 축산은 각성바지로 영양남씨, 영양김씨, 청주한씨, 안동김씨, 무안박씨 등이 자리를 잡았다. 김인현 교수가 건네준 『양천세헌록(陽川世獻錄)』은 안동김씨의 내력으로 축산에 정효각(旌孝閣)이 세워진 까닭을 밝히고 있다. 이러구러 이곳의 인물과 역사의 숨결 속에서 축산항의 오늘을 맞이한다. 나는 축산항을 떠나며 빌었다. 해신(海神)이여, 어머니 같은 바다여! 부디 삶의 둥지를 품어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