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곳곳을 다니며 여기저기 살펴보는 것이 요사이 일과가 되고 있다. 며칠 전에는 우연찮게 모인 몇몇 친구들과 축산의 대소산(大所山) 봉수대를 올라가보았다. 모두들 놀라며 “영덕에도 이런 곳이 있었나!”라며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동쪽으로는 푸른 동해가 끝없이 펼쳐 있고 북쪽으로는 영해평야가 널찍하게 자리를 잡고 있으며 그 끝에는 후포의 등기산이 보인다. 서쪽으로는 낙동정맥이 남쪽으로 달리는 장엄한 모습이 보이는데 그 가운데로 돌아가는 영양 풍력발전소의 프로펠러도 보인다.
또한 봉수대 바로 동쪽 밑으로는 아름다운 축산항의 전경이 그림같이 펼쳐져있다. 항구 남쪽으로는 경정에서 창포를 잇는 해안선이 예쁘고 아름답게 이어지고 있으며, 그 북쪽으로는 사진리에서 대진리에 이르는 해안선이 보일락 말락 산자락에 숨어 있는 것이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것 같다.
이런 이름다움을 가진 축산을 그냥 두어서야 되겠는가? 우선 축산항에 우뚝 솟은 대소산 정상과 전망대가 있는 죽도산(竹島山)을 잇는 케이블카를 설치하여 이러한 경치를 전부 볼 수 있게 하자. 이어 축산항 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만호성(萬戶城)을 복원하고 고려말 이곳에 성을 쌓고 왜구를 무찌른 윤가관 장군과 조선 태조 5년인 1396년에 축산에 와서 왜구를 무찌른 최윤덕(崔潤德) 장군의 승전비를 세우고 또한 1592년 임진왜란 때 창수 위정에서 벌어진 신규년(申虯年)의병장의 위정전투에 대한 기념비를 세워 1919년의 영해3.18만세의거와 같은 맥락으로 이을 수 있게하면면 아마 우리들 핏속에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군민들의 항일 애국심을 크게 알려 진작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축산을 중심으로 잡히고 채취되는 물가자미와 아구, 도치 등 각종 해산물로 누구나 쉽게 먹을 수 있는 먹거리를 개발하여 이곳을 찾는 사람들로 하여금 두 번, 세 번 먹어도 질리지 않은 먹거리가 있는 축산항으로 만든다면 외지의 관광객은 저절로 영덕으로 오게 될 것이다.
축산포 만호성은 고려 우왕 10년인 1384년 7월에 경상도 부원수이던 윤가관 장군이 경주와 안동의 군졸 2천여 명을 동원하여 쌓았다. 둘레가 700여 m, 높이가 2.3m, 넓이는 12, 650㎥이었다. 권근(權近)이 영해에 귀양을 와서 쓴 사재소감 박강전에 의하면 이때 축산에 축산도병선도관령이란 관리를 두었던 것으로 나온다. 축산포 만호에 대한 기록은 태조 5년인 1396년 12월 9일자에 “왜구의 배 60척이 축산도에 이르러 축산포 만호 임온에게 항복을 하였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으로 보아 아마도 고려시대 말기부터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은 조선 초기에 보이는 축산포 만호 임온과 임진왜란 때 보이는 권전(權詮)이란 분을 제외한 인조 10년 이후 역대 축산포에 부임한 만호 명단이다.
<인조 10년 이후 역대 축산만호 명단>
왕력 |
서기 |
성명 |
왕력 |
서기 |
성명 |
인조 10년 |
1635 |
남율(南慄) |
18년 |
1692 |
석동귀(石東龜) |
13년 |
1635 |
이공여(李公與) |
20년 |
1694 |
김내중(金乃重) |
16년 |
1638 |
박몽계(朴夢契) |
24년 |
1698 |
임무성(林茂成) |
18년 |
1640 |
이??(李??) |
24년 |
1698 |
최세주(崔世柱) |
19년 |
1641 |
홍인한(洪仁漢) |
27년 |
1701 |
김성옥(金聲玉) |
효종 즉위년 |
1649 |
박영계(朴永繼) |
28년 |
1702 |
홍우공(洪禹功) |
7년 |
1656 |
이상형(李尙馨) |
30년 |
1704 |
오석흥(吳碩興) |
현종 2년 |
1661 |
최태준(李泰峻) |
33년 |
1707 |
정량좌(丁良佐) |
4년 |
1663 |
김세명(金世鳴) |
35년 |
1709 |
이만길(李萬吉) |
6년 |
1665 |
김준립(金俊立) |
37년 |
1711 |
김신웅(金信雄) |
6년 |
1665 |
오극성(吳克誠) |
39년 |
1713 |
조세휘(趙世徽) |
7년 |
1666 |
최희?(崔希?) |
42년 |
저작권자 고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