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완섭(전군의원) |
이러한 것을 알 수 있는 기록이 “고구려와 말갈이 북쪽 변방에 침입하여 호명(狐鳴)등 7개성(城)을 취하고 또 미질부(彌秩夫)에 군사를 전진시켰다.”라는 기록이『삼국사기』신라본기(新羅本紀)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3년 3월조에 보인다. 이때 고구려는 달산 적은골에서 청송 내룡으로 넘어가는 양설령 쪽의 달로산(達老山), 즉 도로 찾은 산(山)에 성을 쌓고 달로산성(達老山城)이라 이름을 붙였다.
이때의 호명성(狐鳴城)의 위치는 지금의 청송군 진보에서 안동으로 가는 중간인 가랫재 즉 추현리(楸峴里) 부근의 고산(孤山), 혹은 호산(狐山)으로 불리는 곳으로 추정된다. 대개 영덕의 발상지로 여러 곳이 이야기되고 있지만『삼국사기』를 보면 이곳이 영덕의 발상지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래야 신라 경덕왕 16년인 757년에 영덕이 야시홀군에서 야성군(野城郡)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지금의 청송지역인 진안현(眞安縣)과 청부현(靑鳧峴)을 영덕에 딸린 고을로 한 것과 우시군(于尸郡)이던 영해가 유린군(有隣郡)이 되면서 지금의 포항시 북구 청하면(淸河面)일대를 거느리게 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이때까지 영덕현은 지품의 오천 이남으로 내려오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영덕은 고구려의 하슬라주 속하였다가 뒤에 하슬라주가 지금의 강릉인 명주(溟洲)로 바뀐 뒤에도 여기에 속하여 되어 고려초에 이르러 태조왕건의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할 때까지 그대로 이어 내려 왔다.
고려태조 23년인 940년에 이르러 야성군은 영덕군, 유린군은 예주(禮州)로 바뀌었으며 예주에 지금의 진보인 보성부, 영양군, 평해군, 영덕군, 지금의 청송군 지역인 청부현, 송생현 즉 1부(府) 3군(郡) 2현(縣)을 관할하도록 하였다. 이후 영해는 1259년에는 위사공신인 영해 박씨 박송비(朴松庇)장군으에 의해 덕원소도호부(德原小都護府)로 되었으며, 이어 예주목(禮州牧)이 되어 목사·판관·사록·장서기 등의 중앙관료들이 파견되어 동해안 일대의 여러 군현(郡縣)을 관장한 명실상부한 고을로 이름이 있었다. 이럴 때 이혼(李混)이란 분이 예주목사(禮州牧使)로 부임하여 무고(舞鼓)를 만들었는데 지금도 이때 만들어진 무고가 공연이 되고 있어 영덕의 대단함을 엿볼 수 있다. 이후 1310년에 예주목에서 영해부로 바뀌게 되었다. 야성군에서 영덕군으로 바뀐 영덕은 고려시대의 대부분은 작은 현에나 파견되는 감무(監務)가 파견되었다가 고려말에 현령이 파견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영해는 영해도호부가 되어 비상시에는 영해도호부사가 영덕현과 청하현을 관장하여 대처하였으며 1675년에는 영양현이 영해부에서 독립하여 가는 과정에서 임금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하여 영해군(寧海郡)으로 강등이 되었다가 얼마지 않아 복귀가 되었으며 1895년 6월 23일에는 안동부(安東府) 영덕군·영해군이 되었으며 1896년 8월 4일자로는 경상북도 영덕군·영해군이 되었다가 1914년 4월 1일자로 양군이 병합이 되어 통합 영덕군이 되면서 9면(面)이 되었으며 이후 1읍 8면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