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 날은 순국선열(殉國先烈)의 날만이 아니다. 이 날이 바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하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된 날이다.
특파대사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와 주둔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의 겁박에 굴복한 을사오적(박제순,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이 조약안에 찬성하고 국새(國璽)와 외무대신의 관인을 훔쳐서 서명한 것이다. 외교권을 잃은 치욕의 날을 기억하면서 순국선열의 뜻을 기리고자 임정(臨政)의 의정원에서 이 날로 정한 것이다.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는 한일합병 전에 조선통감부 초대통감으로 있었고 안중근 의사로부터 저격당했다.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는 합병 후에 조선총독부 제2대 총독을 한 자들이다.
요즘 우리 국민들 중 이 날에 대한 정확한 정의와 정신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순국선열은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해방 전날인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에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하다가 그 반대나 항거로 인하여 순국<전사(戰死), 형사(刑死), 옥사(獄死), 자결(自決), 피살(被殺), 옥병사(獄病死))한 분으로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 건국포장, 대통령표창을 받은 분을 말한다. 위와 같은 공로로 돌아가시지 않은 분은 애국지사(愛國志士)이다.
순국선열의 선정 기준이 까다롭고 행정 우위로 규정되어 그 혜택을 못 받는 대상자가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국권침탈(國權侵奪) 후부터 해방 전날까지 일제에 항거하거나 반대하는 활동에 참여한 인원은 학술상 매우 많을 것으로 평가된다. 학계의 추산을 보면, 의병항쟁이 10만 여명, 만주지역 무장 항쟁이 4만여 명, 3·1운동 등 국내 항일 운동이 1만여 명 등 대략 15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 이 가운데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분이 3,500명 정도이니 전체의 약 2.3% 수준이다. 더구나 그중에서도 국가보훈 혜택을 받는 후손은 약 780명으로 0.52%로 미미한 실정이다.
순국선열들이 의병항쟁이나 무장 항쟁을 하느라 은밀하게 젊은 나이에 고향을 떠났고, 자녀 양육에 소홀할 수밖에 없으며 특히 본인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후손이 없거나 대가 끊어진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렇다 보니 직계 후손이나 방계(傍系) 후손을 찾을 수 없고, 후손이나 가족들도 먼 만주 지방 등에서 일어난 항일 운동의 현황을 파악하기 불가하여 묻힌 것이 대부분일 수 있다. 순국선열유족회는 순국선열의 유족이 약 94만 명으로 추정하지만 혈맥이 끊어진 경우가 많을 것으로 본다.
순국선열은 예우에서도 애국지사의 예우와 비교해서 매우 열악하다고 유족회는 주장한다. 유족회의 주장에 따르면 애국지사의 예우는 현충원 묘역, 각종 기념행사, 회관지원, 보상금, 유족 교육비, 의료비 지원 등 무려 42개항에 달하고, 고속도로 통행료 면제, 지하철 무료, 등록금 면제, 취업 알선, 아파트 공급 등 수많은 혜택이 집중되지만 순국선열 유족에게는 허술하다고 한다.
또한 옛 서대문형무소를 서대문구청이 관리하면서 옥사(獄舍)마다 새겨진 수많은 순국선열들의 사연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6개월간 민주화 투쟁으로 갇혔던 김근태 씨에 관한 설명만 가득하며, 옥사(獄舍)의 형상도 변경하여 민주화운동인물들을 전시함으로써 순국선열들의 이미지를크게 훼손시켰다고 유족회장은 지적한다.
보훈처나 광복회 등 보훈기관이나 단체들이 역사 바로 세우기를 한다면서 친일, 반일 논란을 일으켜 국민 여론을 편 가르기 하지만 말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아직도 미확인된 순국선열들의 업적과 발자취를 제대로 파악하여 이분들의 영예로움을 높이고, 후손들의 삶을 보살피는 것이 진정한 보훈일 것이다. 보훈이 바로 설 때 나라가 든든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