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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고

<영덕의 빛과 바람> 이호신 화백의 그림 순례(3)

고향신문 기자 입력 2026.03.06 10:46 수정 2026.03.06 10:51

3.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 도해단(蹈海壇). 대진항


<벽산 김도현 도해단>


모든 것을 받아주는 바다. 그 바다로 걸어 들어간 사람이 있다. 망국의 한을 품고 자존의 삶을 스스로 마감한 한 의병장의 사연이다.
이른바 죽음의 가치는 한 평생을 살아 온 무게와 같고, 잊히지 않는 것은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살아서는 뜻을 빼앗을 수가 없고, 죽어서는 이름을 빼앗을 수가 없다(生則不可奪志, 死則不可奪名)’고 『예기』(禮記)에서 말한바와 같다.
영해 대진바다 암반위에 세워진 전각이 ‘벽산 김도현 도해단’이다. 여기에 오르면 한 장부의 기개가 파도처럼 일어나고 누구든지 비석의 글을 읽고는 존엄과 함께 숙연해 진다. 김도현 의병장이 생을 마감하기 전 남긴 시를 옮긴다.

벽산 선생의 유시(遺詩)

조선왕조 오백년 마지막에 태어나 붉은 피 온 간장에 엉키었구나.
我生五百末 赤血滿空腸(아생오백말 적혈만공장)

중년의 의병투쟁 19년에 모발만 늙어 서리 끼었는데
中間十九載 鬚髮老秋霜(중간십구재 빈발노추상)

나라가 망하니 눈물이 하염없고 어버이 여의니 마음도 아프구나
國亡淚未己 親沒心更傷(국망누미기 친몰심갱상)

홀로 외롭게 서니 옛 산만 푸르고 아무리 헤아려도 방책이 없네
獨立故山碧 百計無一方(독립고산벽 백계무일방)

머나먼 바다가 보고팠는데 이레 날이 마침 동지로구나
萬里欲觀海 七日當復陽(만리욕관해 칠일당부양)
희고 흰 저 천 길 물속이 내 한 몸 넉넉히 간직할 만 하여라
白白千丈水 足吾一身藏(백백천장수 족오일신장)

김도현(金道鉉,1852~1914)은 경상북도 영양군에서 태어나 1895년 11월 단발령이 선포되자 안동 등 여러 곳에서 의거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것을 알고 영남의 선비들과 상경하여 을사늑약 반대 상소를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어 자결로 순국하려 하였으나 동지들의 만류로 다음을 기약한다. 그 후 1907년 정미의병 당시에는 이만도(李晩燾)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고 1914년 11월 부친이 돌아가시자 마침내 유서와 절명시를 남기고 영해 대진바다에 투신하였다.

이후 벽산 선생 도해(蹈海)의 뜻을 기리기 위해 일제강점기 시절 영해, 안동을 비롯한 전국 유림에서 도해비를 건립(1915.3,13) 했지만 왜구가 모두 부수었다. 그 후 광복이 되고나서 건립모금운동을 통해 복구(1954.11)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마침내 1971년에 도해비를 설단 하고 ‘벽산 김도현 숭모회’가 성사되어 매년 음력 7월 14일에 제향하고 있다.

검은 돌에 새겨진 비석 글씨 ‘千秋大義’(천추대의)는 박정희 대통령 글씨다. 한글 서체를 여러 곳에 남긴 곳은 많지만 한문글씨는 드문 편인데 기운과 기상이 서려있다. 그리고 비문의 내용은 노산 이은상이 썼다. 당시 이곳을 방문한 박대통령이 100만원을 희사하고 직접 휘호를 내렸다고 함께한 임해식(林海植) 회장(벽산 김도현 선생 숭모회, 1948년생)이 말해 준다. 이 숭모회는 매년 음력 7월 14일에 제향 행사를 여는데 영양군과 영덕군이 합동으로 봉행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한 동안 겨울 바다를 응시하며 세상에 태어나 대의(大義)를 위해 순절한 님의 시를 바다 위 창공에 띄우기로 했다. 동해의 파도가 가슴에 밀려오듯이 님의 충정을 하늘에 새기고픈 마음으로.

한편 동시대의 인물로 순절한 전남 광양 출신의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 선생의 절명시첩(絶命詩帖)이 떠오른다. 그 역시 국권 침탈에 절명시(絶命詩)로 항거했다. 나라가 망했는데 지식인이 책임을 다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시로 남기고 떠난 것이다.

나는 새와 들짐승도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찡그리니/ 무궁화 우리 세상 이미 잠기고 빠져버렸구나./ 가을 등불아래 책 덮고 흘러간 긴 역사를 생각하니/인간 세상에 선비노릇 참으로 어렵도다

우리 시대에도 위와 같은 의병장과 지식인이 있기나 할까? 마침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특별 기획전 ‘우리들의 이순신’을 배관하였기에 이 글을 쓰는 감회가 남다르다. 오늘날 애국은 고사하고 자기 영달에만 안주하는 세태를 탄식한다.



<대진항>


이제 해안 길을 따라 대진항으로 간다. 이른바 블루로드 언덕 고개길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전망이 이채롭다. 예전의 항구와 정박한 배들과 함께 새로 건설된 바다의 전망대가 시선을 끈다. 이 장면을 드론으로 촬영해 보면 마치 고래의 형상으로 보인다. 그 고래의 중심에 물이 뿜어져 나오는 설치물 이미지도 흥미를 더한다. 그 뒤로 난 방파제 둑길과 붉은 등대도 함께 조화롭다.

이 새로운 발상의 조형물은 2024년에 완공된 것으로 관계당국의 협조와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바다의 조형물 시설은 울산 한진종합건설에서 했으며 창의적인 설계 작품으로 돋보인다. 여행객들이 항구에 차를 두고 걸어서 동해의 기운을 만끽하는 곳으로 배를 타지 않고 망망대해의 사방을 둘러보는 별천지이다.

그러나 한편 이 대진항에서 4대째 살며 대진2리 어촌계장을 지낸 박서일(朴緖一 ,1945년생)씨는 나의 호기심에 속마음을 털어 놓는다.

“ 관계당국이 대진항을 위해 멋진 시설을 해주어 참말로 고맙지요. 덕분에 사람들이 무척 많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관리자가 없고, 카페나 가게 하나가 없어 사람들이 그냥 구경하고 사진만 찍고 가요. 사람들이 자주 물어요, 실제적으로 저 시설이 마을에 도움이 되는가 하구요... ”

마을의 아쉬움을 대신 알려 주기로 하고 그를 따라 간곳은 길목 주변 검은 비석에 새겨진 ‘海佛神位’(해불신위) 장소이다. 형상물은 없이 비석만 있는 4평 정도의 공간으로 소위 바다의 신을 모신 곳이다.
유래는 200년 전 석불상(石佛像)이 파도에 밀려 마을로 왔기에 바다에 버렸는데 다시 밀려오기에 길조(吉兆)로 여겨 이곳에 모셨다. 어부들 뱃길의 안위(安慰)를 빌며. 그런데 그만 불상이 사라져 1973년 새로 모시고 치성을 드리다가 2011년에 불상을 그 터에 묻고 위패만을 모시게 되었다. 한 해에 세 차례 제사를 올린다고 한다.

또 내가 마을당집을 묻자 그는 한 횟집가게의 좁은 통로를 거쳐 보여주는 곳이 대진 2리의 마을제당이다.
동산 아래 10평 정도의 터에 목조 기와집으로 돤 제당은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洞神權公之位’(동신권공지위)로 되어 있다. 제상 위에 향로와 촛대가 있으며 바닥엔 돗자리가 깔려있다. 건물 뒤로는 사악함을 쫓아낸다는 엄나무가 눈에 띈다. 이곳의 동신제는 300년 전부터 유래한다니 매우 뿌리가 깊다.


이곳 대진항은 주로 문어, 장어, 게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는데 예전만 못하다고 하여 길손의 마음이 무겁다. 인근의 수산물과 횟집, 그리고 숙박업에도 영향이 있을 것이기에. 하지만 이제 봄이 오고 있으니 기대와 희망을 말하고 싶다.
대진항의 전경을 화첩에 담으려 다시 언덕길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현실과 달리 아름답다. 상대산 아래로 어촌이 펼쳐지고 정박해 있는 배들이 즐비하다. 저 배들이 출항하여 만선의 기쁨을 누리길 기원하는 마음이다. 해안 길 너머의 원경으로 ‘벽산 김도현 도해단’도 보인다. 그리고 바다위에 떠있는 배들은 바다의 삶을 보여준다. 그 너머 수평선에 솟아오른 칠보산 자락이 아스라이 하늘과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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