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장(朴弘長)선생은 1558(명종 13)∼1598(선조 31)년 조선 선조 때의 무관, 본관은 무안(務安), 자는 사임(士任), 아호는 농아당(聾啞堂)이다.
박홍장 先生은 武官으로 평안도의 아이만호(阿耳萬戶), 선전관(宣傳官), 제주판관(濟州判官), 제주조방장(濟州助防將), 영암군수(靈巖郡守), 대구부사(大邱府使)등을 역임하였으며 특히 1596년(선조 29)에 대구부사(大邱府使)로 있을 때 영의정의 西厓(서애) 유성룡(柳成龍)의 추천으로 通信府使가 되어 정사(正使)인 황신(黃愼 1562~1617)과 더불어 강화의 중책을 띠고 일본에 갔다. 도요토미(豊臣秀吉)가 조선사절을 멸시하여 국서에 답하지 않았으나 조금도 굴함이 없이 국가의 체통을 욕되게 하지 않고 돌아온 후 가자(加資)가 됐다.
주손인 박신일 회장은 종댁중건에 대해 1960년 사당(祠堂)과 함께 보관돼 있던 수많은 전적(典籍)들이 화재로 모두 소실돼 이로 인해 상심하여 통한(痛恨)을 안고 돌아간 조부임과 선고(先考)의 염원(念願)에 노심초사(勞心焦思)하든 중 13대 주손인 박신일 회장은 문중의 박정락 회장과 제종인(諸宗人)들의 협조로 농아당공의 불천위(不遷位)와 묘우(廟宇), 재실(齋室)등이 중건(重建)됨을 피력해주었다.
주손 박신일 회장은 “옛 풍습들이 사라져가는 현실에서 수 백년 간 이어온 불천위제사(不遷位祭祀)를 봉향하여 후손들이 조상(祖上)의 얼을 한 치의 소홀함이 없도록 가문(家門)을 지켜내겠다”고 말했다.
이날 전국에서 찾아온 출중한 유림들이 농아당공선생의 혼을 기리기 위해 많이 참석하여 社)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가 전국의 유림석학(儒林碩學)들과 박홍장 선생의 구국활동학술연구 발표한 책자를 발간하여 선물로 나눠주었다.
한편 명문가의 맏 종부인 걸출(傑出)한 시·화작가(詩·畵作家)인 ‘정정순 불교문학회 회장’도 모든 문명이 초고속시대로 변하지만 지속가능(持續可能)한 유교문화(儒敎文化)의 존속(存續)을 위해 선조(先祖)의 뿌리와 얼에 큰 관심을 가져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