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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동원의 해설이 있는 詩】

김효진기자 jinapress@hanmail.net 기자 입력 2020.11.26 15:00 수정 2020.11.30 10:46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박숙이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나는

화사한 라일락처럼 피어 있을 것이다

그를 위해,

싱싱한 웃음 몇 개를 준비해 두는 일

비가 샌 내 몸을 감쪽같이 도배하는 일

안개에서 빠져나와 샤워하고

아, 분주해라

그가 묻더라도

곰팡이 슨 그리움 한 쪽은 시치미떼며 감춰두는 일

내 가슴에 키운 돌미나리 몇 뿌리는

비상금처럼 숨겨두는 일

그가 눈치 채기 전까지는

내 몸이 겹이란 걸

감추고 있는 불이란 걸

절대 실토하지 않을 것이다

오랜만에 그가 내 곁에

포근한 산 그림자처럼 쓰러져 누울 때

잊었던 몸,

물푸레나무 푸른 잎사귀로 되살아날까

그런데, 그런데 그가

참았던 봄을 한꺼번에 터뜨려오면 어떡하지?

 

 

첫 시집『활짝』(2011, 시안)에 수록되어있는, 박숙이의「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은 현대사회의 젊은 부부의 은밀한 사생활 시이다. 시적화자는 사랑하는 남편이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화사한 라일락처럼 피어 안기겠다는 야릇한 여심(女心)을, 시 행간 속에 은유로 감춰두고 있다. 에로티시즘은 시인들이 독자들을 은밀히 시 속에 끌어들이는 중요한 시적 소재이다. 박숙이 역시 감춤과 드러냄의 시학으로 독자들을 유혹한다. 비가 샌 여인의 몸을 감쪽같이 감추고, 안개에서 빠져나와 샤워까지 마친 그녀가 침대 위에서 내숭을 떠는 붉은 여심을, 연상 시법으로 멋지게 처리했다.

 

이 시에서〈그가 눈치 채기 전까지는 / 내 몸이 겹이란 걸 / 감추고 있는 불이란 걸 / 절대 실토하지 않을 것이다〉란 표현이야말로, 여자의 심리를 아주 리얼하게 드러낸 시행 같다. ‘여자의 비밀은 무제다’란 말이 있듯이, 비밀스런 여자일수록 남성에겐 더 매력적으로 비친다. 시속의 여자는 낮에는 현숙한 아내지만, 밤이 오면 언제든지 요부로 변할 수 있다는 걸 암시한다. 자신의 몸이 관능의 ‘겹’이며 욕정의 ‘불’이라는 걸, 한 번도 남편에게 들킨 적 없는 이중 심리를 가진 그런 여자이다. 이 시 속의 시적 화자는 근대와 현대의 성 관념을 동시에 갖고 사는 여인 세대의 심리가 작품의 기저에 투영되어 있다.

 

이 시가 갖고 있는 또 하나의 신선한 매력은 ‘돌미나리’, ‘물푸레나무’의 식물성을, 여자의 몸으로 연상하게 한 점이다. 하여, 마지막 행《그런데, 그런데 그가 / 참았던 봄을 한꺼번에 떠뜨려오면 어떡하지?》란 기막힌 역설적 표현을 얻었다. 이 표현이야말로 에로티시즘의 극치이다. 이런 시적 상상력이야말로 독자들에게 사실의 세계와 허구의 접점을 이어주는 무지개와 같다.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이 아내의 몸을 탐하며 절정의 순간에 참았던 봄을 방사(房事)하는, 합궁의 묘리를 펼친 시인의 솜씨가 기가 막힌다.

 

박숙이 시인은 경북 의성 출생이자, 1999년『시안』으로 등단했다. 그녀의 첫 시집『활짝』(2011, 시안)은 주변생활에 대한 시인의 말 걸기 작업이다. 삶에 달라붙은 자잘한 일상을 낯선 눈으로 재해석한다. 때로는 유머와 상징으로, 때로는 은유와 연상으로, 그녀만의 발칙한 시적 상상력을 펼친다. 근래에 보기 드문 서정 시편들이 소복하게 꽃핀 시집이『활짝』이다. 요컨대, 박숙이는 서정시의 묘리를 터득한 한국현대시단에 몇 안 되는 주목받는 중견시인이다.

 


1962년 경북 영덕 출생. 대구에서 성장.

1994년『문학세계』 ‘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 『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 출간

2002년 제 2시집 『구멍』 출간

2004년 제 3시집 『처녀와 바다』 출간

2007년 동시집 『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 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 『시, 낭송의 옷을 입다』 출간

2014년 평론집 『시에 미치다』 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2016년 제 4시집 『깍지』 출간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동시당선

2017년 동시집 『태양 셰프』 출간

2018년 시 대담 평론집 『저녁의 詩』 편저

2018년 대구문학상, 최치원문학상 대상 수상.

2020년 시선집 『고흐의 시』 출간

 계간지 『문장21』 봄호 평론 당선

한국시인협회, 대구시인협회 부회장. 대구문인협회시분과위원장. 『텃밭시인학교』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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