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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고

【김동원의 해설이 있는 詩-20】 누에고치

고향신문 기자 입력 2022.12.19 04:33 수정 2022.12.19 04:35

김정화

 

그래요, 아버지

그 실만은 끊지 말고 비밀스런 작은방에서 숨 쉬어요

 

골목을 돌아가다 담벼락 실피꽃밭에

올망졸망 달린 오디 보니

어릴 적 내가 뛰놀던 언덕 집이 보여요

 

겨울이면 토끼랑 꿩도 잡던

흰 눈이 뒷산 솔가지 위에서 빛나고,

윗방보다 누에 방이 더 컸던 토방에

오무락 오무락 움찔대던 하얀 누에들

 

나는 깨금발로 용쓰며 누에를 쳤지요

병든 아버지 머리에 시퍼런 오디 물들고,

천 약의 뽕나무도 소용이 없어

저승사자처럼 지켜보네요.

 

그사이 두고 평생 집 짓다 들어앉은

뽕잎 먹고 고치 치는 누에보다 더 부지런한

무명실 토해내는 아버지

 

깡마른 몸 누에고치 억지로 집어넣으려고

몸을 구부리고 쪼그라드는 연습 중,

 

아버지가 병실에서 명주실을 짜요

멀뚱멀뚱한 당신 눈망울이 뽕나무에 걸렸어요

 

 

 

언어는 시간의 무상함을 견딘다. 시는 개인사의 기록이자 은밀한 고백이다. 시를 잘 쓰려면 우선 좋은 시를 많이 읽어야 한다. 사물들을 고요히 응시하고 관찰하여 자신만의 관점을 가져야 한다. 시는 모든 언어들의 바다이다. 천 갈래 만 갈래 생각과 기억들을 모아 강물이 되어 닿는다. 현대인들의 언어는 늘 불안하다. 마음이 평온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시대에 서정시를 그리워하고 호명하는 이유는,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시는 감성과 이성의 균형 잡힌 시각이 중요하다. 서정시는 시대를 초월하여 조화로운 세상을 꿈꾸게 한다. 좋은 서정시일수록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다.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행복한 마음을 일깨우는 시가 좋다. 두고두고 읽어도 또 보고 싶은 시가 명작이다. 시작詩作이 좋은 이유는, 언어를 통해 하늘 위의 학이 되기도 하고, 물 속 고래가 되기도 하고, 마음 가는 대로 되고 싶은 대로 변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 인간만의 멋진 상상력 때문이다. 꿈꾸는 자의 얼굴은 얼마나 행복한가. 하여, 시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무지개다리이다. 번뇌와 욕심을 버리고 지혜와 건강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아름다운 무늬이다. 가상 세계보다는 현실 세계에서 더 많은 좋은 시가 나온다. 고통을 견디고 체험한 언어야말로 진실하며 감동적이다.

 

김정화 시인(의성 출생)의 2021년『문장21』가을호 당선작「누에고치」는 자신만의 놀라운 시법을 터득하고 있다. 대다수의 그녀의 시편들은 대상의 표면에 머물지 않고, 깊은 이면을 들추고 있다. 시의 안창을 보여주고 있으며 시어의 기술과 탁마는 높이 살 만하다. 「누에고치」는 생사의 기로에 선 병상의 아버지를 시의 제재로 삼았다. 누에고치는 죽음을 건너가는 아버지의 은유로 깊은 울림을 준다. “비밀스런 작은방”에서 숨을 몰아쉬는 아버지의 노쇠는, 애벌레에서 고치로, 고치에서 다시 나비로 부활하려는 우화와 비견된다. 그렇다. 아버지의 세대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려고 누구보다 부지런히 “무명실”을 토해내던 그런 분들이었다. “깡마른 몸 누에고치 억지로 집어넣으려고” “연습 중”인 병든 아버지의 묘사는, 절박하면서도 감동적이다.

 

서정시의 구심역은 기억과 추억의 방식으로 변주된다. 안과 밖의 창窓을 통해 묘사와 풍경을 이야기 구조로 구부린다. 시단의 눈치나 명작의 데자뷰을 비껴가면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보할 때, 서정시는 신선하다. 고뇌의 절박한 지점은 좋은 서정시가 나아갈 방향이다. 몽상의 세계에 사로잡혀 시의 관점이 축소되면, 개인적 서정에 머물게 된다. 빛나는 작품은 과감히 인식의 틀을 벗고 뛰쳐나올 때 가능하다. 최근 시들은 너무 추상적이고 행간의 유기적 결합이 허황하다. 반면 김정화 시인의 시「누에고치」는 시대의 유행에 좇지 않은 현실 체험이 눈부시다. 어두움 속에서 ‘누에고치’를 통해 삶과 죽음의 내밀한 읊조림은 자신만의 목소리다. 체험적 시어야말로 시인에게는 언어의 살점과 뼈를 발라 눈부시게 부활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좋은 시는 현실 깊숙이 파고 들어가, 인간 체제의 허虛와 실實을 꿸 때 홀연히 드러난다. 수많은 시인들이 도전과 응전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시법을 터득하고 있다. 삶의 희노애락 문제를 첨예하게 발설하는 자者가, 새로운 서정시의 꼭두가 된다.

 


1962년 경북 영덕 구계항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자랐다. 1994년 『문학세계』로 등단,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동시, 2020년 『문장21』에 평론이 당선되었다. 시집 『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 『구멍』, 『처녀와 바다』, 『깍지』, 『빠스각 빠스스각』, 시선집 『고흐의 시』, 시 에세이집 『시, 낭송의 옷을 입다』, 평론집 『시에 미치다』, 동시집 『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 『태양 셰프』출간하였으며, 시평론 대담집 『저녁의 詩』를 편저했다. 대구예술상(2015), 고운 최치원문학상 대상(2018), 대구문학상(2018), 영남문학상 수상(2020)을 수상했다. 대구시인협회부회장 역임, 대구문인협회 이사, 한국시인협회원, 대구아동문학회원, 『텃밭시인학교』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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