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동수 칼럼위원 |
공자는 사랑에 대한 정의를 상대방이 잘 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인간은 참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간다. 관계의 핵심은 공자님이 말했듯이 상대가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랑은 주는 사람의 입장도 중요하지만 받는 사람의 입장을 더욱 고려해야 한다. 내 주변의 관계를 돌아보며 내가 주고있는 사랑의 방식이 과연 상대방에게도 옮은 것인지 한 번쯤 고민해보는 것도 꼭 해야 할 일중에 하나인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 하려 하지 말라. 그보다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내가 갑자기 무슨 사랑의 전도사가 된 것 같다 물론 아니다. 가까운 지인들의 가정불화를 전해들으며 안타까움을 느끼던 중 마음속으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불쑥 뛰어 나왔다.
젊은 시절 오랜기간 동안 연애를 하며 주변의 부러움을 쌓던 친구들이 막상 결혼을 하고 나서는 사랑을 지속하지 못하고 파경을 맞는 일들을 종종 보아 왔다. 내가 잘 알고 있는 지인도 그랬다. 그런 사례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세대들은 연애결혼 보다 중매결혼이 더 많아는데 이혼율은 지금보다 훨씬 낮지 않았나? 그들은 결혼 전에 얼굴도 모르는 남남이었지만 결혼 후에 애듯한 사랑을 가꾸고 부부의 정을 돈돈하게 쌓아가면서 百年懷爐(백년회로)를 하는 것이 아닌가? 반면 활활 타오르다가 불이 꺼지고 열기가 씩으면 사늘한 재밖에 남지 않은, 그런 불같은 사랑으로 맺어진 인연은 위태롭지 않은가? 성공적인 결혼 생활과 화목한 가정생활을 유지 하는데는 젊은 시절 그런 열정적인 사랑 보다 좀 무덤덤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서로를 이해하고 아끼고 존중하며 배려하는 마음 씀씀이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물론 필자 주변에는 어린 시절부터 한 동내에 살면서 친구처럼 우정을 키우다가 결혼 한 이후에도 부부로서 애정을 유지하면서 잘사는 이들도 많다. 이런 점에서 부부간에는 사귐과 결혼의 방식이 어떻해는냐 보다, 상호 존중과 배려의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변변한 연애 한 번 못해 보고, 관념적 사랑이나 맴돌던 청춘의 시기가 떠오른다. 마음이 끌리던 여성에게 다가가 좋아한다고 고백할 용기가 나지않아 멀리서 지켜보다가 그만 발길을 돌리던 시절 말이다.
연애에 자신도 없었고 가난한 시골 대학생이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향 부모님으로부터 보내주시는 생할비는 턱 없이 부족하여 팔방으로 알르바이트를 하다 결코 1학기를 맞이고 입대를 했다. 복학을 하고보니 모두가 후배들이었고 시골 학생을 눈여겨 보는이도 없었다. 바쁜 가운데도 틈틈이 시간이 나면 도서관으로 향했다. 책을 읽던 중에서 ‘사랑이 무엇인가‘ 란 글을 읽었다. 이 책에서는 사랑을 가장 추한 쪽에서 가장 아름다운 쪽으로 이동하는 운동성이라는 구절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필자는 이 구절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사랑이란 사색을 하기 시작했다. 사랑의 운동성을 행동으로 구현하기 보다 사랑의 의미를 탐색한 관념적 의미로 자리 잡아갔다. 결국 필자는 대학시절 연애는 커녕 미팅 한 번 못해보고 마쳤으니, 돌아 보면 참 아쉽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생각했던 ‘사랑 할 수 있는 사람과 결혼 하라’ 생각이 사랑의 운동성에 관한 개념이 기억속에 숨어 있다가 다시 튀어 나온지도 모른다. 사랑은 고정되고 완성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완성된 것에 아름다운 상태에 도달하고자 끈임없이 움직이고 노력해가는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랑은 운동성이다. 늘 운동성으로 상대에 대한 책임있는 마음으로 가까이하는 것이다. 사랑은 책임이다. 그리고 책임있게 움직이는 운동임을 잊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