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의 3·18의거 만세는 기독교인들이 주동이 되어 조직하여 시위대의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기독교 전도사 김세영(金世榮)과 정규하(政奎河), 구세군 정위(正尉) 권태원(權泰源) 등이 핵심이 되어 조직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격렬한 시위를 했다. 지품면 낙평리에 사는 그 마을 낙평교회 전도사 김세영은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하여 평양으로 가던 중 경성(서울)에서 3·1 만세 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학교 가던 걸음을 멈추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동지들과 연락하여 조직을 하기로 마음먹고 평소 교회를 통하여 친분이 있는 권태원을 만나 서울에서 목격한 3월 1일 독립 만세 운동 실체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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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역사적 풍토에 기독교인들의 활약을 통하여 시위에 참가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이는 선조들의 기질을 닮은 것으로 사료 된다. 특히 영덕 지역 유림 측이 적극 참여 한 것은 기독교인 박희락(朴希樂)이 유림 출신들과 잘 어울리게 한 활약이 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위 조직도에서 보는 것과 같이 당시 조직은 김세영, 권태원의 주도하에 남부 김혁동, 지품면 김중명, 북부 정규하로 하고 영덕에는 영덕읍 예배당 강우근 장로 와 목사인 강우일, 지품면 김태을, 주명우, 창수 권성호, 병곡 남효직, 영해 남여명 등의 교인들로 조직책으로 하였다.
이에 조직하고 계획한 대부분의 사람이 개신교 교회 성도들이었다. 영덕군에서 발간된 교회 역사 사료 및 연혁을 통해 잘 알 수 있었다. 특히 영해 시위는 3,1운동 시위 중 한강 이남에서 가장 격렬했던 독립 만세 운동이었다.
3월 12일 정규하가 구세군 권태원(송천교회)과 3월 18일 성내리 시장에서 시위할 것을 결의하고 조직책을 통하여 연락하였다. 3월 18일 영해 시장에 약2,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 만세를 부르고 찬송가와 행진곡 등의 노래를 부르면서 시위를 시작했다.
당시 조직책 중 군중을 유도하던 사람은 대부분 개신교 교인들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찬송가를 지휘하며 부른 분은 권태원, 정규하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영덕지역 파견된 권찬영(한국명) 선교사의 지도 조언이 한 부분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참고자료와 증언을 통하여 미루어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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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수집, 정리 : 영덕읍교회 봇도랑(水路)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