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암(獅子巖)은 침수정(枕漱亭)앞 향로봉(香爐峰)아래에 있다. 예전부터 옥계(玉溪)를 유람하는 사람들은 아프리카나 인도(印度)에서 살던 사자(獅子)가 어찌 달산 옥계(玉溪)에 그것도 침수정(枕漱亭)앞 향로봉(香爐峰)아래에 하나의 바위로 변하여 턱 버티고 앉아 있는지에 대하여 모두들 궁금하게 여겼다. 사자는 고양이과에 속하고 몸집이 크고 기운이 세어 백수(百獸)의 왕이라고 불리는 초대형 육식 동물이다. 주로 광활한 사바나 지역, 즉 건기(乾期)가 뚜렷한 열대와 아열대지방에서 발달한 초원에 살았으며 지금은 주로 사하라 사막 남쪽의 아프리카에만 분포해 있다. 이런 사자가 영덕 옥계 계곡 건너 향로봉에 어떻게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사자(獅子)는 사람 말을 할줄 모르고 사람은 사자말을 할 줄 모르니 앞으로도 영원히 아는 사람은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옥계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중국의 주도(周鍍)가 스스로를 주왕(周王)이라 일컬으며 반란을 일으켜 당나라 임금 덕종(德宗)을 공격하였지만 군사들의 태반(太半)을 잃는 대패(大敗)를 당하고는 당나라 군대의 토벌을 피하여 남은 무리들은 요즘의 배트남이나 태국을 향하여 도망을 쳤는데 이때가 8, 9월 태풍이 많은 시기였으므로 이들은 제주도(濟州道) 부근에서 태풍을 만나 포항의 호미곶까지 표류하다 결국은 지금의 강구항(江口港)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들은 이후 여기서 머물지 않고 당나라의 추격군(追擊軍)을 피하여 더욱 더 깊은 곳으로 숨어들기 위해 오십천(五十川)을 거슬러 올라 지품면(地品面) 신양리(新陽里)앞의 대벌연(大伐淵)이란 큰 못을 가로지르고는 대서천(大西川)을 거슬러 올라 달산의 흥기 3리 궁터(宮基)에 도착을 하였다.
당시 주도(周鍍)는 바다로 피난을 할 때 당시의 풍습대로 바다 속의 잡귀를 쫓기 위한 비법(秘法)의 하나로 배에다 사자를 싣기 위하여 당시 인도(印度)의 아유타국(阿踰陀國)의 수리마다(秀犁亇多)국왕에게 부탁을 하여 그곳에 살고 있던 어린사자(獅子) 한 마리를 빌려 배에 싣고 왔는데 육지에만 살던 사자가 갑자기 배를 탔으니 이 사자는 심한 배 멀미로 ‘거의 죽기 직전이었다.’한다.
마침내 7,8월 태풍을 겨우 피한 주도(周鍍)는 지금의 강구항의 오십천을 거슬러 올라 달산면 흥기 3리 궁터 앞의 대서천에다 배를 정박시키자 사자(獅子)는 육지의 흙냄새를 맡자마자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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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마침 옥계(玉溪)의 구석구석을 살펴보며 다니고 있던 옥계(玉溪)의 산신(山神)에게 발견되어 ‘조선천지(朝鮮天地)에서는 처음 보는 놈이니 옥계(玉溪)에서 경주로 가는 길목의 수호신(守護神)이나 해라.’는 산신의 명(命)을 받고는 그때부터 이곳을 지키게 되었는데 세월이 흘러 이 사자는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 한 개의 바위, 곧 사자암(獅子巖)이 되어 지금까지도 산신이 명한 수호신의 임무를 충실히 지키기 위하여 동헤로부터 청송 주왕산에 이르기까지 이 근방의 모두를 두루두루 살피고 있다.”고 한다.
아무튼 사자암(獅子巖)의 사자(獅子)는 오늘도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주도(周鍍)가 자기를 잡으려고 오는 것을 살피고 있는지, 아니면 옥계(玉溪)를 찾는 관광객이 하루에 얼마나 되는지를 헤아리고 있는지는 알지 못하겠지만 언제나 두 눈을 부릅뜨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어도 그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을 본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 희안한 일이다.
다음은 침류재 손성을 선생게서 사자암(獅子巖)을 읊은 한 수의 시이다
어느 해 노(怒)한 늙은 스님이 소맷자락을 떨치며 老衲何年怒拂袖
허공으로 뛰어 올라 이 산의 짐승을 만들었는데 騰空化作此山獸
그 발을 움직이며 좌고우면(左顧右眄)하다간 左顧眄前其足搖
못가에서 오르듯 일어서다간 또 저로 머릴 숙인다네. 搖颺潭邊自伏首
이제 옥계 37경을 모두 돌아보았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안목에 따라가지 못한 부분이 허다한데도 즐거이 읽어주신 모든 분들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건승하시길 고대(苦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