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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고

25경(景) 진주암(眞珠巖)

고향신문 기자 입력 2024.10.04 09:57 수정 2024.10.04 09:59

영덕의 명승절경 옥계 37경을 찾아서(26)
| 영덕문화원 이완섭 사무국장

진주암(眞珠巖)은 침수정(枕漱亭)에서 보면 바로 전면 앞에 보이는 삼층대(三層臺)밑에 있다. 옥계주차장에서 포항시 죽장으로 가는 길 시냇가에 우뚝 솟아있다. 즉 옥련암(玉蓮庵)에서 흘러내려 오는 물이 죽장과 달산을 거처 지품과 영해로 있는 도로를 만들다 다리만 거창하게 만들어 놓은 바로 그 길 밑의 시내에 있다.
 

이곳은 옥계를 이루는 두줄기의 큰 물줄기의 하나가 옥련암(玉蓮庵) 앞을 지나 이곳 진주암(眞珠巖)을 잠시 두드려 정신을 차리게 하고는 조금 더 흘러 내려가 팔각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배소의 물과 합쳐 강구항(江口港)으로 내달리도록 동력(動力)을 키워주는 곳이기도 하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예전 어느 시대인지도 모르지만 중국의 왕(王) 주도(周鍍)라는 양반이 부하들의 반란으로 서해바다로 피난을 떠났는데 마침 태풍을 만나 목적하였던 곳은 가지못하고 결국은 동해에 이르러 오십천을 타고 올라와 옥계를 지나 청송이 어느 산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숨어 살았다는데 나중 어느 때 이 산의 이름이 주왕산(周王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아무튼 달산 옥계(玉溪)를 지나 주왕산으로 피난을 온 주도(周鍍)가 피난지인 이 산에서 생일을 맞은 왕비 수달래부인을 위로하고자 옥계 신선에게서 학소대(鶴巢臺)에 웅크리고 있던 학(鶴)을 빌려 타고 영덕 강구 앞 깊은 바다의 용왕(龍王)에게 가서 만년이나 된 큰 조개가 품고 있던 진주(眞珠)를 얻어 청송 주왕산 꼭대기에 어설프게 지어놓은 대궐로 가지고 가던 도중 이곳 옥계(玉溪)를 지나다 그 경치에 놀란 학이 몸서리를 치자 주왕(周王) 주도(周鍍) 대신에 진주(眞珠)가 떨어져 기나 긴 세월 동안 먼지가 진주 위에 쌓여 진주암(眞珠巖)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사람들은 "주도(周鍍)가 옥계의 경치에 놀라 진주(眞珠)를 떨어뜨렸는지 아니면 학(鶴)이 놀라 진주(眞珠)를 떨어뜨렸는지를 알 수가 없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진주암(眞珠巖)에 쌓인 세월의 이끼를 걷어낸다면 아마 전세계에서도 그 크기를 이길 수 없는 진주(眞珠)가 그 바위 속에 움크리고 있을 것이다."라고 하며 쓸데없는 소리를 전하는 사람도 있다.
 

대개 진주(眞珠)는 건강과 장수를 상징하며 여성적이며 부끄럼을 많이 타는 것을 나타낸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진주(眞珠)가 천년의 바위, 진주암(眞珠巖)이 되어 이곳에 우뚝 솟아 있으니 아마 옥계(玉溪)뿐만 아니라 영덕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며 부끄러움을 타지는 않은 자태를 뽐내고 있는 것은아닐까?
 

아무튼 진주암(眞珠巖)은 옥계(玉溪)의 시내 가운데 우뚝 솟아 있으며 옥계의 맑은 물을 더욱 맑게 하여 강구 오십천으로 내려 보내고 있으니 이 맑은 물을 짠 바닷물과 섞어 먹고 자라는 영덕바다의 생선은 당연히 최고의 맛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최고의 건강식 재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니 영덕인의 장수와 건강은 아마 자연히 자연스럽게 우리에 주는 것이라 하겠다.
 

다음은 침류재 손성을(孫星乙)선생께서 진주암(眞珠巖)을 읊은 한 수의 시이다. 이 시의 용면거사(龍眠居士)는 중국 북송 때의 학자이며, 정치가, 문인화가였던 이공린(李公麟)을 말하는 것으로 자는 백시(伯時), 호는 용면거사이다. 용면산(龍眠山)에 은거하며 그림그리기에 열중하여 후세에 이름이 있었다하는데 특히 그가 그린 오마도권(五馬圖卷)이 유명하다. 아직 살아있다면 옥계 37경을 그려달라고 부탁이라도 해볼건데......
 

기기묘묘한 이 바위는 그리기가 최고로 어려우니 奇妙玆巖狀最難
용면거사(龍眠居士)가 여기와도 역시 탄식만 하겠지만 龍眠到此亦應嘆
가뭄 든 해에 비를 빌면 영험(靈驗)이 있는데 旱年禱雨靈多驗
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보기에는 좋다네. 不是尋常作好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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