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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고

【김동원의 해설이 있는 詩-5】

고향신문 기자 입력 2021.03.04 15:37 수정 2021.03.05 12:37

지다

 

김석

 

 

수변공원 산책길에 수국을 샀다

흰 수국 앞에 당신은 거품처럼 환했다

 

큰 꽃은 큰아들을

작은 꽃은 작은아들 닮았다지만

내겐 한 송이 당신 닮았다

 

환하던 날짜 이윽고 지고

꽃 사라진 빈 화분엔

수국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지워지고

 

아이들 객지로 떠난 빈 화분에

다시 피어난 수국

당신의 손전화기에서 뿌리를 내렸다

 

화면에서 솟아나는 물방울 문자들

수국, 자잘한 꽃잎이

당신의 웃음을 더 활짝 피워 올렸다.

 

어느 해 팔월 그 어느 날

거품처럼 수국은 져 나리고

수국보다 더 환하던, 당신의 웃음도

 

지고

       

 시인 김석(1957~, 포항 출생)은 지면에 이런 요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괜찮다’라는 말 참 슬프다. 시인은 삶의 현실을 언어로 풀어내는 사람이다. 시의 모티브가 반드시 은유나 상징으로 포장되어져야 하는가? 오히려 가벼운 것, 하잖은 것, 평범한 소시민의 가벼운 일상 등이 시의 옷을 입고 나올 수는 없는 것일까? 시인은 가벼운 일상을 무겁고 깊은 사유를 통해 진솔한 목소리로 들려줄 수는 없는 것일까? 어려운 시만 좋은 시가 되는 것일까? 나의 삶과 나의 시가 ‘혼자’가 아닌 ‘우리’는 될 수 없는 것일까? ‘혼자’가 ‘우리’가 되기 위해 나는, 아직 면벽수행 중이다.”(김석) 초기 김석의 시는 연작시 선문답에서 ‘시는 무엇인가’, ‘삶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화두를 참구한 적이 있다. 평범한 일상의 풍경을 ‘선禪’의 세계로 끌어올린 그의 시는, 이후 서정시에 기반한 울림과 감동의 진폭을 넓히고 있다. 언어 이전과 언어 이후의 세계를 교직한 자신만의 독창적 시의 독법을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선禪을 통해 언어의 침묵과 공空의 영토를 확장했다면, 서정을 통해서는 가슴과 영혼의 떨림을 감지한 것이리라.

 

 시, 「지다」는 제목이 그 시의 전체 얼개를 규정한 좋은 실례이다. “시(詩)는 태어나는 그 순간 자신의 때(時)와 운명을 갖게 된다. 지음(知音)을 만났을 때 즐거이 음송되고, 기운마저 덧입혀져 시의 고유한 목소리와 아우라를 부여받게 된다. 언어 생명은 유기체다. 파장을 가진 물질이다. 하여 그것은 끊임없이 부족한 기(氣)를 보충해야 하는데 시제는 바로 그 역할을 톡톡히 수행한다. 흔히 제목은 텍스트의 현관(玄關)이자 내용을 규정한다. 사람을 만나 제일 먼저 보는 것이 얼굴이듯, 시의 제목은 그 사람의 첫인상과도 같다. 여기서 형식과 문체가 풍채에 해당한다면, 이목구비와 그 마음인 심(心)은 시의 내용을 온축하고 있다. 그 결과 독자들은 시의 내용을 채 파악하기도 전에 얼굴인 제목에서부터 시의 기색(氣色)을 단박에 알아채고 만다. 인상적인 제목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특히 제한된 언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승산을 점치는 시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시제가 부여하는 생각과 느낌이 더욱 오롯하고 매력적이면 아무래도 시의 독자들을 오래 잡아 둘 수가 있다. 더 읽지 않아도 시의 뒤태까지 좋아 보인다. 물론 그릇된 고정 관념이나 첫 인상으로 더러 실망과 실의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김동원, '시에 미치다' 중에서)

 

 김석의 「지다」는 ‘수국’을 ‘죽은 아내’로 은유한 시이다. 수국의 지는 순간을 죽은 아내의 운명과 결부한 이 시는, 시인이자 남편으로서의 한없는 외로움에 크로즈업된다. “수변공원 산책길에 수국을 샀다 / 흰 수국 앞에 당신은 거품처럼 환했다” 이 시구에서 ‘당신은 거품처럼 환했다’ 이 행간이야말로 슬픔의 극치다. 죽은 아내와 ‘거품’의 거리는 이승과 저승만큼 아득히 먼 시간과 공간을 함의한다.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아내의 부재가 참으로 곱고 아프게 채색된다. 아내를 닮은 “큰아들” “작은아들”은, 시인에겐 이승에서 핀 또 다른 두 송이의 수국꽃이다. 하여, 시인은 “당신을 닮”은 그 꽃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윽고 환한 수국은 지고, “꽃 사라진 빈 화분엔 / 수국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지워지고” 아내가 없는 텅 빈 집은 적요하다. 시 「지다」의 반전은 뿔뿔이 객지로 떠난 자식들에게 걸려 온 전화를 통해, “다시 피어난 수국”으로 찬란하게 부활한다. 그러나 이내 시인은 꽃잎이 떨어진 수국을 보며 “거품처럼” 사라진 아내를 사무치게 그리워 한다. 김석의 「지다」는 ‘수국’과 ‘지다’ 사이의 수미상관의 시적 묘를 통해, 기막힌 제목으로 승화된다. 그만큼 시인의 슬픔과 외로움은 강렬하고 순수하다. 어쩌면 그의 시는 서정시가 가닿을 수 있는 지고지순의 사랑과 이별, 그 거리쯤일 것이다.

 


1962년 경북 영덕 출생. 대구에서 성장.

1994년『문학세계』 ‘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 『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 출간

2002년 제 2시집 『구멍』 출간

2004년 제 3시집 『처녀와 바다』 출간

2007년 동시집 『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 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 『시, 낭송의 옷을 입다』 출간

2014년 평론집 『시에 미치다』 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2016년 제 4시집 『깍지』 출간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동시당선

2017년 동시집 『태양 셰프』 출간

2018년 시 대담 평론집 『저녁의 詩』 편저

2018년 대구문학상, 최치원문학상 대상 수상.

2020년 시선집 『고흐의 시』 출간

          계간지 『문장21』 봄호 평론 당선

한국시인협회, 대구시인협회 부회장. 대구문인협회시분과위원장. 『텃밭시인학교』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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