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인현 교수(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
경자향변 혹은 영해향변이라는 단어가 익숙하지 않지만, 영덕군지에도 나와 있다. 조선시대에는 정식부인이 아닌 혼인 외의 여성으로부터 태어난 자식은 서얼이라고 하여 천대받았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여 그 억울함에 많은 사회적인 문제를 야기했다. 이 정책이 완화될 조짐을 보였다. 조정에서 서얼의 사회진출을 조금씩 허용하기 시작하였다. 영해부를 중심으로 향교와 서원들이 있었다. 향교는 유학자들에 대한 제사를 모시고 양반 자제들을 교육시키는 기관이었다. 이에 반하여 서원은 사설학원과 같았다.
영해지방은 남인이 중심이었는데, 서얼들이 서인과 손을 잡고 향교의 행사에 참여하고자 했다. 마침 영해부사로 새로이 부임한 최명현 부사가 서인이라서 이들 서얼들을 중심으로 서얼들의 편을 들었다. 당시 기존의 영해지방의 양반들을 구향이라고 부르고 서얼중심의 서인들을 신향이라고 불렀다. 기득권을 침해당한 구향들이 경상감사에게 투서를 하여 관에서 조사를 나와 여러 사람이 귀양가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한 조사는 통상 인근의 관청에서 담당했는데, 영해부의 바로 옆의 관청인 영덕현의 이장우 현감이 담당하게 되었다. 1839년의 일이었다. 이런 내용은 경자향변 일기에 자세히 나와 있다고 한다. 이장우 현감은 이런 사태의 조사관으로 엄격한 입장을 취했을 것이다.
이번에 번역 출간된 안동김씨 영해문중에서 발간되는 양천세헌록(陽川世獻錄)에 이장우 현감의 개인 서찰인 편지가 3통 남아서 공개되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그 당시에 있었던 영덕·영해지방의 일들이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 편지글에 의하면 그의 모습은 양순하고, 병약하고 예의바른 분으로서 영해 향변을 조사하던 추상같았을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영해부 남면 양장(축산2리)에 사는 김제진(濟鎭) 선생은 서울에 가 있는 이장우 현감에게 명란 등 선물을 보냈다. 김제진 선생이 어떤 인연으로 타 고을인 영덕현감과 친분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당시 이장우 현감은 부인상을 당하여 있던 때였다. 보내주신 명란이 너무 맛있어서 밥을 더 많이 먹게 되었다고 답장을 보냈다. 이때가 1839년 12의 일이다. 이때부터 축산항의 명란은 고급 선물로 인기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동해안 영덕지방해안가에서 명란이 선물로 사용된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답례로는 붓 2자를 보냈다. 다른 편지에서 이장우 현감은 김제진에게 자신의 지인인 담양출신의 빗장사가 그 쪽으로 가면 잘 보살펴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담양이라면 전라도 지방인데 그 멀리 축산항까지 빗을 팔러 온다는 것이 가볍지 않은 일이다. 축산에 대나무 산이 있으므로 대나무를 구하러 온지도 모르겠다. 축산항을 아름다운 풍경의 축호(丑湖)라고 표시를 하였기 때문에 축산항은 당시 호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상권이 상당히 형성된 것으로 보이다. 감기에 걸려 고생을 했다는 내용도 들어가 있다. 영덕의 일이 점차 많아져서 힘든다는 하소연도 나온다. 아마도 영해향변 처리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영덕지방에 관리를 하던 사람으로서 이렇게 후세에 기록이 남아있는 현감이나 부사는 많지 않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맹활약을 했던 한효순 영해부사의 기록 다음으로 많은 기록이 남은 분이 아닐까 싶다.
하나씩 이런 기록들이 발굴되어 우리 고장의 사회상을 알 수 있다면, 우리 영덕·청송·영양 군민들과 출향인들은 우리 지역에 면면히 내려오는 역사성에 자부심을 가지게 되고, 그렇지 않은 지역보다 정신적으로 우위에 서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최근의 관광은 단순히 자연풍광을 보여주는 것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는 이야기와 함께 하는 추세이다. 우리 고장에서 발굴되는 사료를 통한 재미있는 이야기는 우리 고장의 관광자원으로서 기능을 하게 된다.
영덕·청송·영양 등 우리 고장의 문화와 역사를 찾아 발굴하고 널리 홍보하고 이들을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일은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