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정연 팜그로브(주)농업법인 대표 |
아직 섬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물길이 열릴 때까지 차를 마시고 텅 빈 찻집을 지키는 여주인과 담소를 나누고, TV뉴스를 보고 이런 사소한 경험들도 순간 즐거워 질 일인지 낯설면서도 작은 이 마을이 정겹게 느껴졌다.
커피콩을 볶던 주인이 오늘 물길은 밤10시경 완벽하게 열린다고 한다. 그때부터 바다는 사흘 동안의 푸른 섬, 푸른 길을 허용하게 되는 것이란다. 까다로운 시간표를 가진 이 바다의 신비함이 어쩌면 뭍에 사는 나를 더 설레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비틀즈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콩 볶는 향에 취해 찻집주인에게 조금 더 가까운 테이블로 붙어 앉았다. 볶은 커피콩을 씹어보면 느낌도 맛도 다르단다. 잘 볶아진 커피콩은 씹으면 아삭하고 가볍게 바스라지고 덜 볶아진 콩은 이빨사이에서 치밀한 조직이 흩어지기를 거부하면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맛을 내놓는단다. 혀는 그 맛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것이리라. 덜 볶아진 콩은 일정한 과정을 거치지 않는 한 잡맛으로 버려질 것이리라. 삶 또한 그러하지 않더냐. 덜 익어 성숙하지 못한 삶에서 흘러나오는 맛은 잡맛이다. 신맛도 쓴맛도 아닌 자신의 맛을 갖추지 못한 잡맛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콩이 일정 온도에서 일정 시간동안 열을 받아야 제 맛을 갖추는 것처럼 시련을 거치지 못한 삶 또한 설익을 뿐이다.
저녁 6시 이전의 물때를 놓쳐버렸다고 찻집주인에게 말을 했다. 잠시 물길이 열렸지만 그 시간은 너무 아슬해서 섬으로 가는 길은 통제되었단다. 결국 섬과 육지를 이어주는 길은 차단되었고 진입하지 못한 차들은 방향을 틀어 되돌아가거나 또는 바리게이트 앞에 서서 저 컴컴한 물밑에 대해 상상이나 할 처지였다. 마을 찻집을 발견하고도 이곳저곳을 한참 기웃거렸다. 마땅한 어느 한곳이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결국, 네온불빛이 제일 환한 이 커피하우스로 몸을 옮겨왔다. 마을버스는 오늘운행을 벌써 마감했단다. 낮은 언덕 위 교회당만이 빛을 내고 있었다.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닌데 섬에 근접한 이 시골 마을은 비릿한 갯바람 사이로 간간이 외지에서 밀려오는 승용차의 기척만을 들려 줄 뿐 마을은 어둡고 고요했다. 나는 이 고요함이 특별히 맘에 들었다. 안도감까지 느끼며 천천히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을 읽기 시작했다. 플로베르식의 차가운 묘사방식을 선택한 페렉은 결국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란 더 많은 사물들 -상품들-의 소유에 있지 않고 자유 의지가 꿈틀거리는 인간의 존재근원에 놓여있음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비틀즈의 렛잇비가 흐르고 찻집주인은 여전히 볶은 커피콩 손질을 하고 있는 눈치다. 열 온도에 커피콩들이 터지면서 날아간 껍질들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오븐기에 넣어 열을 가하면 콩들이 탁탁 소리를 내며 콩알이 고동색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창문을 열고 바람을 들이니 판 위에서 가벼워진 껍질이 자꾸 날아오른다. 렛잇비.., 렛잇비.., 순리에 맡겨라. 내버려두어라.. 은근한 풍경이었다.
전화가 왔다. 섬에서다. 길이 열릴 때까지 지루하겠지만 참으란다. 목소리가 걸걸한 이장님의 당부다. 나는 그저 황송하다. 꼼꼼하지 못한 내가 괜히 실례를 한건 아닌지. 오늘 기어이 섬에 가고야 말겠다는 나의 작정이 조금 싱겁게 느껴지다가 이내 살다보면 막차도 놓치고 물때도 놓치고 그럴 수 있지 라며 스스로 위로를 해본다. 지금 내가 있는 이 삼거리는 섬으로 들어가려는 사람과 섬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서로 교차되는 지점이다. 한곳으로 모아지는 어느 한 지점에서 까만 점 마냥 나는 잠시 고정되어 있었다.
섬으로 향한 길 위에서 내 걸음은 오늘 너무 느렸다. 다른 엉뚱한 곳에서 해가 지길 기다리다 결국 허둥지둥 여기 마을버스에 올랐다. 주위 해거름이 완전하게 사위고서야 섬으로 향하던 나의 휴가계획이 좀 특별해지길 바랬다. 괜찮아. 가끔은 우회하며 살아가는 삶도 있을 수 있지. 앞으로 더 많은 길들을 우회하게 될지도 모르지.
서서히 바닷물이 갈라지듯 물속에 잠겼던 푸른 길이 드러났다. 예약한 이장댁에서 확인 전화가 다시 왔다. 시계는 정확히 밤 열시를 가리킨다. 물때시간표가 너무 정확해 신기하기만 하다. 길을 나서니 야릇한 편안함이 몰려오다 이내 또 흥분된다. 힘든 자신을 내버려두고 여기에 갇힌다는 것, 사물들의 윤곽 속으로 나를 가둔다는 것, 사정없이 흐려진 마음하나를 사정없이 풀어놓자는 것, 20 여분 뒤면 나는 섬에 둥실 닿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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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t it be : 그냥 내버려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