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초순 김세영과 권태원은 영덕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을 거행하기로 약속을 하고 다시 병곡면 송천리 정규하와 상의하여 영덕지역에서 만세의거를 결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3·1만세 의거의 전국 확산을 막기위하여 일본 경찰의 예비 검속에 김세영이 3월 13일 영덕 경찰서에 구금되자 권태원은 병곡면 송천리로 돌아와 정규하와 의논하여 경찰서와 거리가 멀고 지역등의 특성을 보아 북부지역이 군중 동원에 좋은 조건이므로 영해 장날 대규모의 거사 계획을 세운다.
한편 3월 초부터 서울 3·1운동 의거에 대한 소식을 듣고 영해면 괴시리의 박희락 남세혁도 유림들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가하기로 약속하고 남씨 문중을 중심으로 동지 규합에 분주히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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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 장날인 3월 18일 오후 1시부터 정규하 남세혁 등의 주동 인물들은 준비된 태극기를 시장에 모인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미리 준비된 대형 태극기를 들고 흔들면서 "대한 독립만세" 라고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때 동원된 군중과 영해 시장에 나온 많은 군중들이 만세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당시 여기에 모인 군중은 일본경찰이 주동자들을 재판하는 판결문에 의하면 2,000명이라고 하였다.
군중들은 시장을 돌며 주민들의 참여를 유도하며 만세를 외치며 일본 경찰 주제소로 몰려가서 일제로부터 독립을 외치기 시작했다. 이 보고를 받은 일본 주재소 순사부장은 군중을 향하여 혜산을 요구하며 태극기를 압수하려고 했다.
한편 흥분된 군중들은 주재소로 몰려가 집기와 무기를 부수고 일본인 순사부장과 일본인 2명을 짓발은 후 다시 영해 읍내로 다니면서 만세를 불렀다. 그 여파로 영덕군내의 3·1운동 의거는 3월 18일을 기하여 각 지역마다 '만세운동'이 일어 났다. 18일은 영해 영덕 창수 병곡에서, 다음 날 19일에는 지품 원전에서, 21일은 지품 신안에서 일어났다.
4월 4일에는 남정면 장사리에서 대한매일신보 기사를 보고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 경찰에 연행되는 등 전 군민이 거군적으로 참여한 대 규모의 비폭력 독립운동으로 수 천년간 내려오는 우리 지역의 굳센 기상을 아낌없이 보여준 일대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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