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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사설] 개항 100주년 축산항 일제강점기 역사자료집 발간과 전시를 축하하며

고향신문 기자 입력 2024.12.13 09:55 수정 2024.12.13 09:56

영덕군에서 설치한 영덕문화관광재단의 활약이 눈부시다. 지난 3일부터 5일까지 영덕북부수협에서는 축산항 일제강점기 축산항 아카이브가 일반인에게 오픈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축산항은 금년 개항 100주년을 맞이해서 다양한 행사를 펼쳐오고 있다. 그중에서 재단은 보물선 프로젝트를 만들어 일제강점기 축산항의 기록을 찾아서 자료집을 만들게 되었다. 전시회와 자료집을 통해 축산항과 영덕에 대해 새롭게 알려진 사실들을 본다.
 

첫째, 축산항의 개항 100주년이라고 할 때 그 기준점은 어업조합이 인가를 받아 축산항에 설립된 해를 말한다고 보아야 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개항이란 외국 선박의 입항이 허용되는 항구를 말한다. 축산항은 외국 상선에 개항이 된 항구로 지정된 적은 없고 지방항으로만 존재했다. 축산항에 상선이 정기적으로 기항하게 된 것은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11년부터이다. 상선이 기항한 것을 개항으로 본다면 축산항의 개항의 시점은 191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둘째, 요시다 선박부가 운항하던 부산-웅기간 정기항로에 다니던 상선이 1911년부터 축산항에도 기항하게 되었다. 부산-울산-영일만-축산포-죽변-삼척으로 이어졌다. 매월 3회씩 800톤급의 상선이 연 36회 기항했다. 1912년부터는 조선우선주식회사가 영업을 이어받았다. 영덕과 축산항에 하객취급소가 운영되었다. 1915년부터는 부산-울릉도를 운항하는 선박이 기항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부산-포항-영덕-영해-죽변-울릉도를 항해하다가, 축산항이 포함되었다. 이렇게 축산항은 일제강점기에 동해안 해운의 중심지로 기능했지만, 지금은 수산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어 그 활용도가 떨어져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셋째, 축산항이 오늘날의 모습을 가지게 된 큰 공사가 세 번에 걸쳐 이 시기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제방공사를 1927년에 했다. 축산항의 방파제 공사가 1932년-1934년 사이에 있었다. 현재 축산항에 어선이 접안하는 시설인 호안공사는 1939-1940년에 이루어졌다. 전기는 1928년 영덕과 강구에 먼저 들어온 것을 영해와 축산의 유지들이 노력하여 1932년 점등에 이르게 되었다. 1909년 축산항의 유지들이 영덕군에서는 가장 먼저 근대식 위산학교를 세웠다. 오늘날의 축산항을 이루기 위해 김유진, 김정한, 미요시 사타로, 강병조, 박봉필, 박영식, 한영각 등 유지들이 큰 노력을 했다는 점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김두진 연구원을 비롯한 연구진은 일제강점기 축산항 아카이브를 만들기 위해 주민들을 방문하여 구술로 진술을 받기도 하고, 귀중한 사진을 얻기도 했다. 그 시대의 신문기사도 모았다. 영양남씨 집안에서 나온 1790년대에 편찬된 축산지와 1830-1860년대 축산항의 이야기가 담긴 양천세헌록도 확보했다. 어촌계와 어업조합의 역사, 당시 동해안에서 외획되었던 수산물과 수산업을 알게 한다. 무엇보다 귀중한 1930년대의 축산항의 모습을 담은 항구의 사진도 공개되었다.
 

이러한 아카이브의 자료는 축산항의 일제강점기 동안의 역사를 말해주는 것이지만, 축산항의 관광자원으로도 큰 기능을 할 것이다. 축산항은 이제 통일신라시대(영양남씨 유허비관련)-고려시대(축산 만호성)-조선시대(양천세헌록과 정효각)-일제강점기(아카이브 자료등)로 이어지는 모든 시대의 역사물을 갖는 어촌마을이 되었다.
 

영덕군에서 운영하는 영덕문화관광재단은 이렇게 긍적적인 기능을 한다. 개인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 단체인 재단을 통해서 축산항의 역사가 복원되었듯이 강구, 영해, 창수, 병곡 등으로도 이러한 아카이브가 만들어지길 기대한다.
 

울진, 영양, 청송 등 인근 군에서도 이와 같은 아카이브가 만들어져 주민들에게 자긍심을 갖게 하면서 관광의 자원으로도 활용하여 각 군의 발전에 이바지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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