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때는 둔세동(遁世洞)이 세상 모두와 단절된 첩첩산중(疊疊山中)이었기에 그 적막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살던 사람이거나 이곳을 알던 이들은 "사람들이 세상을 피하여 사는 곳"이라 하여 둔세동(遯世洞)이라 부르거나 생각하며 스스로 즐겼을 것이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그 예전 신라시대 어느 한때에는 세상을 등진 사람들이 이곳 굴을 포함하여 둔세동(遯世洞) 일대에 "4백여 가구가 모여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이후 이곳에 숨어 살던 사람들은 "고려때 원(元)나라 몽골군대가 경주까지 와서 온 경주 시내를 파괴할 때나 임진왜란 때 왜군(倭軍)이 경주를 지나 안강까지에 이른 것조차 모르고 한세상을 살았다."고 하며 근래는 해방이후 치열하였던 좌우익의 갈등과 1950년에 일어난 6.25 한국전쟁도 몰랐으며 심지어는 1950년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한 양동작전(陽動作戰)의 하나로 장사상륙작전(長沙上陸作戰)을 결행할 때 어설프게 참여하였던 문산호(文山號)가 장사 동네 앞의 모래톱 위에 얹혀 아직도 상륙작전을 끝내지 못하고 모래톱 위에서 대기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다고들 한다. 당시 둔세동(遯世洞) 사람들은 뭐가 뭔지 모르지만 저 멀리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조차도 모를 희미한 포성(砲聲)만 몇 번 들었다." 한다. 이렇게 이곳은 세상사(世上事)와는 등진 곳이었다.
아마 이곳 지명(地名)은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어 본 대학자(大學者)가 지은 것 같다. 사서삼경(四書三經)에 중용(中庸)이라는 책(冊)을 보면 "군자는 중용(中庸)을 좇아 세상을 피해 은둔함에 알려지지 않아도 후회는 하지 않는다. (君子依乎中庸 遯世不見知而不悔)"라는 내용이 있다. 바로 이곳에서의 삶이 그러하였을 것이다. 내가 좋아 숨어 사는데 어느 누가 알아주지 않은 들 무슨 이유로 불만을 가질 수 있으랴? 그래서 중용(中庸)의 이 구절을 따와 마을 이름을 둔세동(遯世洞)이라 지은 것은 아닐까 하며 혼자 생각해 본다.
다음은 둔세굴(遯世窟)을 읊은 손성을(孫星乙) 선생의 시(詩) 한 수이다. 조용히 혼자서 읊조릴 만한 시(詩)다.
우러러보면 눈꼽만한 하늘이고 내려다보면 산중인데 仰天只麽俯山中
과시 이곳은 천산둔괘(天山遯卦)의 상(象)과 같네 果是天山卦象同
지금 세상은 넉넉하여 속세를 피하는 사람도 없는데 今世人無肥遯者
굴 이름을 어찌 약초캐고 나무하는 노인들에게만 맞추었는지… 窟名寧合採樵翁
이 시에서의 천산둔괘(天山遯卦)는『주역(周易)』의 한 괘(卦)로 "소인들이 왕성히 일어나는 조짐을 보고 군자는 물러나 스스로 닦아야 할 때를 안다."라는 뜻이 있다. 그렇다. 세상이 나와 맞지 않으면 조용히 물러나 자신을 닦을 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물러나 때를 기다리다 군자가 득세하는 그런 세상이 오면 출세(出世)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둔세(遁世)를 하면 됨을 말하는 것이 이 괘(卦)의 뜻이다. 그런 때가 올지 오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비둔(肥遯)이란 뜻은 넉넉한 마음으로 속세(俗世)를 떠난 사람을 말한다. 주역(周易)의 천산둔괘(天山遯卦) 상구(上九)의 비둔무불리(肥遯无不利)에서 온 말이다. 곧 "숨어 사는 삶도 이롭지 않음이 없다."라는 뜻이다. 하여간 이렇게 사는 삶도 넉넉하고 풍성함도 있으므로 살만한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곧 세상사(世上事)는 마음먹기에 달려있고 스스로 하기에 달려있다는 것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니 생각이 많아 백년을 못사는 인간보다 저 산의 생각 없이 서 있는 소나무나 생각 없이 솟아 있는 바위가 천년을 사는 것은 왜일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내 생각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