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문화관광재단에서 '동고동락'이라는 테마로 영덕 군내 이백여 개의 마을에 잠자고 있는 팔, 구십 대代 분들의 이야기들을 듣고 동화책으로 출간하는 작업을 3년째 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이 작업이 많이 성행하고 있으며 행정의 지원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역사책은 온통 전쟁, 건국, 투쟁, 혁명, 정권교체 등등의 기록이 주를 이루지만, 그 역사 속에는 개인이 이웃과 함께 살아온 일상의 기억이 더 소중한 사료史料라는 지각 때문에 시대의 요청이 달라지고 있다.
움직이지 않는 문화재와 문헌文獻에 기록된 흔적들을 발췌하여 그 지방과 관련된 부분의 자료 정리는 시간이 지나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삶에 묻어 있는 이야기나 그 마을만의 풍습, 전통, 습관 등은 기억에 의존하여 찾아내어야 한다.
결락缺落 없이 생생한 일상사가 완성된 역사의 교훈을 후대에 전달할 수 있다는 취지이다
바야흐로 '호모 아키비스트 (Homo archivist : 기록하는 사람)의 시대가 열려 가고 있다.
'어르신 한 분의 일생은 사전 한권'이라는 옛 말씀을 우리는 다시 새겨서 기록된 역사와 유물, 유적만이 유일하고 빛나는 역사라는 의식에서 벗어나 살아 있는 역사를 정리하고 소중하게 간수 해야 한다.
근대를 살아오신 현재 팔, 구십 대代는 미처 돌아볼 겨를이 없던 삶을 이어 오느라 기억 더미를 꺼내 보는 것에도 조심스러워한다.
그분들의 까마득한 기억들을 느리게 살펴보면 우리의 역사 흐름이 보이고 시대적 맥락이 읽힌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어디로 향하는가. 무엇을 원하는가.
가깝게는 가족에게, 멀리는 후대에 물려줄 자신의 생애사를 다시 꺼내기를 매우 조심스러워하지만, 그들이 반추한 기억 중 당대 상황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 적지 않다.
미처 기록하지 못했던 일상은 찬찬히 표정으로도 먼저 드러낸다.
그 표정에서 현 세대가 관심 가지지 못했던, 그분들에게 어떤 정체성과 뿌리가 있는지가 발견되어 현 세대와 또 하나의 교감이 이루어진다.
우리가 구분하는 베이비부머에게도 추천될 수 있는 세대공감이다.
평범한 개인의 이야기가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런 점들이 모여 한 시대의 공동체 기억으로 우리 마을만의 거대한 역사를 이루게 된다.
이런 저력을 가지고 있는 근대를 살아온 분들의 기록은 가만히 있으면 사라지고 만다.
어느 작은 공간에 갇혀 빛을 발하지 못하는 개인의 기억이 밖으로 나오는 순간, 역사의 작은 퍼즐 조각이 하나, 둘 채워져 나간다.
기억 속에 갇혀 있는 소중한 기록들은 어떻게 생성되었는가도 모른 채 언제 사라질지도 모르니 반드시 완결된 형태여야 하는 것이 아니고 아주 특별한 사연이 있어야 할 필요도 없다.
진솔한 이야기를 들은 후 기록물을 정리(아카이브)한다는 뜻으로 동화 창작을 한다는 것이 삶에 대한 성찰이면서, 세대 간 교류이다.
평범한 기억이라 할지라도 누군가에 의해 귀하게 활용될 때까지, 더 많이 기록, 보존, 공개돼야 한다. 그냥 단지 개인이 잊고 살기 아까운 장면을 남기는 것만으로도, 후대는 그 너머의 의미를 읽어내어 자신의 삶의 길잡이로 삼아서 새로운 창작이 되기도 한다.
당연한 듯 들려도 새삼스러운 말이다. 그저 그런 삶이라고 이 '기록 시대'에서 누락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는 얘기이다. 살아온 숱한 날이 아무것도 아닐 리 없다. 그리하여 지금은 기록을 시작할 시간이다. 평범하되 소중한 그 시절이 저만치 사라지기 전에.
귀한 옛 기록의 복원은 모두 일상의 기록에서 출발하여 기록되는 삶으로 우리 삶은 더 강건해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또 어떤 분의 작은 역사가 사라져 소중한 자료가 망실되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떠오르면 지방 소멸이라는 중대한 문제 해결책과 병행된 정책 수립을 강렬하게 권장하고 싶다.
인구가 줄어 수많은 군 단위 기초자치단체들이 사라질 위기인데, 그 안에 녹아 있는 정신과 정체성까지 흩어지게 둘 순 없다.
어르신들의 기억 정리를 위한 대담對談은 건강 치유에도 상당한 효과가 있으므로 개인 삶의 기록 교육이 꼭 필요하다고 본다.
공공기관의 기록은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보관하지만, 민간 기록은 어떻게 생성되고 사라지는지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다.
개인의 기록물은 사회 공동체의 근간일 뿐 아니라 누적되어 온 산 경험은 사회의 큰 자산으로 그 어떤 다큐멘터리(documentaey) 보다 값지다.
그리므로 개인 기록을 책으로 발간하는 것보다 대담對談한 내용들을 디지털 아카이브로 구축 되기를 바란다.
팔십대 이전 분들의 삶은 전근대의 풍습과 신문화新文化의 회오리 속에서 휘둘리며 이어왔다. 또 우리 나라의 격동기를 혹독하게 겪으신 분들이다.
각 마을 어른들의 살아 있는 기억들을 하나도 놓치지 말고 소중히 간수 하는 체제가 반드시 이루어지고 지속되기를 바라며......
"동네 어른 한 분이 일생을 마치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