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하여 기축옥사(己丑獄事)이다.
사건의 발단은 정여립(鄭汝立)이 모반을 한다는 고변(告變)으로 시작되었다. 정여립은 원래 서인(西人)이었고,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인이었다. 그러다가 이조전랑(吏曹銓?)으로 물망에 오를 즈음 동인(東人)의 이발(李潑)과 친해 동인으로 전향했다.
역사적·학술적으로 정여립이 실제 모반(謀反)을 계획하고 실행의 의지를 가졌는지는 정론으로 확립된 게 없다고 들었다. 그가 서인에서 동인으로 진영을 바꾸었고, 그의 학문적 스승을 험담했으니 서인의 입장에서 보면 사문난적(斯文亂賊)임에 틀림없다. 또한 그는 늘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정해진 임금이 있겠는가?”(天下公物 豈有定主 : 천하공물 기유정주)라고 주장했다.
또한 “요임금·순임금·우임금 순으로 왕위를 넘겼으니 성인이 아닌가?”(堯舜禹相傳 非聖人呼: 요순우상전 비성인호),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랴”(何事非君 : 하사비군)” 라고도 하였다.
당시 왕정시대의 가치관에 비하면 엄청난 정치적 혁신이념이다. 영국의 크롬웰(Oliver Cromwell)이 1649년에 공화정(Commonwealth)을 세웠으니 그와 비견(比肩)된다 하겠다.
특히 그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한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계원들은 매달 모여서 무술을 연마하거나 회합을 가졌고, 1587년에는 전주부윤(府尹)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으로 손죽도(損竹島)에서 왜구를 격퇴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대동계 활동이 각처로 퍼지고, 전북 진안에서 활동한 정여립을 황해도 감사(監司) 한준(韓準), 안악군수 이축(李軸) 등이 고발한 것으로 봐서 황해도에도 대동계가 활발했을 수도 있다. 이는 곧 왕이나 집권세력에게는 모반의 방증(傍證)이 될 수 있다.
이 사건은 정통성에 대한 심리적 콤플렉스(Complex)를 지녔던 선조(宣祖)로서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좋은 기회였다.
서인 또한 사문난적(斯文亂賊)을 제거하고, 정적(政敵)을 숙청하여 집권 기반을 공고히 할 수 있는 아주 큰 호재(好材)였다. 집권세력이었던 동인들은 사건의 추이에 따라 닥쳐올 결과를 미처 예측하지 못했다.
정여립이 모반을 할 정도의 인물이 아니라고만 판단하고 신문(訊問)을 하면 곧 해결되리라 봤다.
하지만 추국(推鞫)을 맡은 위관(委官)은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되고, 직속 신하인 선전관(宣傳官)이 정여립의 집을 압수 수색하여 확보한 문서와 서찰 등 올가미를 움켜진 선조(宣祖)의 속내를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기축옥사와 비교해 보면 현재 진행형인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의 법·검(法·檢) 갈등이 재미있다. 현 여권은 죽은 권력인 전 정권에 대한 적폐청산 수사에 능력과 실적을 발휘했던 인사를 청문회(聽聞會)에서 야당의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임명했다.
검찰의 정치적 독립과 검찰개혁의 적임자라며 자기 진영으로 생각한 것이다. 인사권자는 임명장 수여식에서는 청와대, 정부, 집권여당 어디든 권력형(權力型) 비리에는 엄정하게 대처하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느 진영도 아니고 국가와 국민만을 바라본다는 입장일 게다.
정여립은 서인으로 유창하고 강력한 언변과 상대를 압도하는 논리로 당시 꽤나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래서 그는 서인이지만 인사부서의 요직인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다. 그러나 서인의 영수(領袖)인 이이(李珥)가 그의 직정적(直情的인) 성격을 지적한 연유인지 선조가 임명하지 않았다.
동인들과 친해졌지만 따지고 보면 서인도 동인도 아닌 지금의 검찰총장처럼 경계인(境界人)이었을 것이다. 스승을 폄하(貶下)하는 행동으로 봐서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 또 하나의 사례였다.
탈원전(脫原電) 정책 결정에 대한 수사,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 수사, 전·현직 법무장관 관련수사, 각종 권력형 비리 의혹 사건에 대한 엄정한 수사는 살아있는 권력에 칼을 겨누는 것이다. 공정(公正)과 정의(正義)를 쫓는 사람에겐 임금이 누구이고 어느 진영인지는 중요하지 않지만 조선시대였으면 모반으로 볼 수 도 있다. 또한 인사권자나 진영에게 충성은커녕 도리어 칼을 겨누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배신행위일 것이다. 천하공물(天下公物)과 역성양위(易姓讓位)를 공공연히 외치며 무력집단을 양성하는 자와 다를 바가 없다.
조선시대의 위관(委官)인 정철(鄭澈)의 역할을 현직 법무장관이 맡아서 모반자를 잡듯이 배신자를 처단하려고 한다. 그는 몇 차례의 인사로 총장과 가까운 사람들을 모두 쳐내고 자기 진영으로 채운다. 이 일로 많은 유능한 검사들이 옷을 벗거나 한직으로 유배(流配)를 당했다. 기축옥사의 죄 없는 선비들처럼 당했다. 기회가 될 때마다 수사지휘권을 발동하여 손발을 묶고, 이제는 쫓아내기 위해 감찰권을 휘두른다.
당시 위관인 정철의 국문이 신통치 못할 경우, 선조(宣祖)는 보관하고 있던 문서와 서찰(書札)을 들고 흔들면서 관련자들을 색출하곤 했다. 그 당시의 의사소통 수단이던 서찰(書札)이 가담자(요즘 말로 적폐청산 대상자) 색출의 좋은 증거였다. 지금은 소통 수단으로 서찰보다는 이메일(e-mail)이나 SNS가 대세인데, 작금에도 친문 몸통의 소통 수단인 SNS 공세가 큰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자기편은 지키고 상대편을 옭아매는 SNS의 폭탄이 투하된다.
후세의 사가(史家)들 중 기축옥사를 서인(정철과 송익필)의 기획과 선조의 연출로 보는 시각도 많다. 옥사(獄事)를 실행한 이익을 가장 많이 차지했기 때문이다. 선조는 정통성 시비에서 벗어나 왕권 강화의 기틀을 만들었고, 서인은 동인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했다. 지금도 수사지휘권 발동, 특활비 사건, 감찰권 실행 등 법무장관의 기획력이 발휘되고, 인사권자는 묵묵부답이지만 친문 몸통들의 다양한 공세가 그 당시를 방불(彷佛)케 한다.
옥사를 통하여 그들의 숙원이 이루어졌지만 제일 앞장선 정철(鄭澈)은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신세를 면치 못했다. 선조(宣祖) 또한 조정의 신료들과 국론(國論)이 분열되어 곧바로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국가와 국민을 누란(累卵)의 위기로 몰아넣고 말았다.
지금의 상황은 어떤가? 법·검(法·檢) 갈등의 최선봉장인 법무장관과 인사권자는 끝까지 안전할 것이며, 집권 여당은 정권을 연장할 수 있을 것인가? 국내적으로는 더욱 심각해지는 진영 갈등,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경제 침체, 부동산 폭등, 실업 증가 등 풀기 어려운 문제가 산적하고, 국제적으로는 미·중 갈등과 북핵문제의 해법이 막중하다. 국민의 입장에서 정치권이 선조시대처럼 자칫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 지는 우를 범할까 두렵다.
기축옥사(己丑獄事)로부터 431년이 지났는데, 세상은 변했는가? 또 앞으로 변해 가는가? 분명하게 많이 변했고 앞으로도 더 많이 변해갈 것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게 있는 것 같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마음은 별로 변하지 않은 것 같다. 국가와 국민의 미래는 도외시하고 자기 진영의 손톱만 한 이익에 골몰하는 인간의 본성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역사(歷史)를 공부하고 그것을 잊지 않아야 할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