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메리카, 아메리카
장하빈
나는 그녀를 아메리카, 아메리카라 부른다
그녀의 이름은 ‘미주’!
난 아직도 ‘미주’라는 이름의 어원을 모른다
그녀의 맑은 눈망울을 바라볼 땐 ‘아름다운 구슬’이었다가
깊은 볼우물에 머무는 순간 ‘아름다운 물가’로 금세 바뀐다
어쩌면, 그녀가 '보그VOGUE'라는 카페를 차린 걸로 보아
‘아름다울 미美, 술 주酒’일 거라는 엉뚱한 생각 스치기도 한다
그렇거나 말거나
나는 그녀를 아메리카, 아메리카라 부른다
나는 종종, 화투 패를 잡는다
그녀와의 궁합을 맞춰 보려는 게 아니라
오직 아메리카행 티켓을 손에 쥐려는 것
한때의 유행 좇아
머나먼 약속의 땅에서 그녀와 아메리칸 드림을 펼치고 싶은 것
그러니 패거리들이여!
내가 대박 노린다고 핀잔주지 마라
흔들고 피박 씌우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오롯이 존재하거늘
쓰리~고!
오늘밤도 태평양 횡단하는 크루즈호에 대박의 꿈 싣고
나는 아메리카, 아메리카로 간다
장하빈의 시집 『총총난필 복사꽃』(2019, 시학) 속에 수록된 시, 「나의 아메리카, 아메리카」를 읽을 무렵 나는, 릴케(1875~1926, 프라하)와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1861~1937, 러시아)가 주고받은 사랑의 연시에 푹 빠져 있었다. 루를 위한 시인의 시는 들불처럼 내 심장에 옮겨 붙었다. 〈내 눈을 감기세요 / 그래도 난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 내 귀를 막으세요 / 그래도 난 당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 입이 없어도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 내 팔을 꺽으세요 / 나는 당신을 가슴으로 붙잡을 것입니다. // 내 심장을 멈추게 하세요 / 그럼 나의 뇌가 심장을 고동칠 것입니다. // 당신이 나의 뇌에 불을 지르면 / 그 때는 당신을 내 핏속에 실어 나르렵니다. - 전문「내 눈을 감기세요. Lösch mir die Augen aus〉루 살로메를 위한 시」〉(릴케,『기도시집』)
그렇다. 사랑의 틈새엔 언제나 시의 꽃이 핀다. 스물 둘의 릴케는 서른여섯 루의 가슴 속에서 뮤즈를 보았다. 릴케가 루에게서 천국과 지옥 사이에 핀 사랑을 보았듯, 장하빈 역시 한 여인에게서 시적 영감(靈感)을 받는다. 내가 처음「나의 아메리카, 아메리카」를 읽었을 때, 나는 그 시속의 여인이 상상의 인물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실재하는 만질 수 있는 관능이었다. 미주(美酒)라는 그녀가 궁금해 장 시인을 보채 '보그VOGUE'라는 카페를 찾은 것은, 어느 저녁 무렵이었다. 〈Vogue〉라는 간판 이름은 ‘유행’을 뜻하는 세계적 패션 전문 잡지 이름이다. 카페 겸 술집인 입구는 유혹적이었고 2층으로 휘어져 들어가는 문(門)의 곡선은 취흥이 돌았다. 서른쯤의 매혹적인 그녀와 첫눈이 마주쳤을 땐, 시인의 시구처럼,〈맑은 눈망울〉이〈‘아름다운 구슬’이었다가 / 깊은 볼우물에 머무는 순간 ‘아름다운 물가’로 금세〉바뀌었다. 앞태(態)는 세련되었으며, 돌아선 은유의 뒤태는 드레스 밖으로 드러난 그 육감적 볼륨으로 인해, 순간 내 눈에 붉은 장미가 피었다. 아마, 장하빈은 이 아편 같은 꽃향기에 취해 시의 영감이 번쩍 떠올랐으리라. 하여, 그녀를 찾아 시인은 밤마다〈나의 아메리카, 아메리카〉로 달려갔으리라.
그 밤 나는 그녀가 따르는 능숙한 시의 술잔을 받아 마시며, 그 야릇한 행간의 눈매에 푹 빠졌다. 칵테일을 든 장 시인과 미녀와 흔들리는 불빛은 멋진 앙상블을 이루었다. ‘시는 이런 곳에서도 태어나는 구나.’ 혼자 중얼거리며, 나는 화장실 문을 밀었다. 뒤샹의 변기 앞에서 나의 물줄기는 낯선 시어(詩語)마냥 쾌미를 뿌렸다. 한참 줄기를 털다 고개를 쳐든 나는 그만, 한 풍경에 경악했다. 변기 바로 위쪽에「나의 아메리카」란 시가 예쁜 액자 속에서 웃고 있는 것이 아니가. 그녀는 〈Vogue〉의 남자 손님들이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에, 자신에게 받친 장하빈의 ‘사랑의 연시(戀詩)’를 붙여둠으로써, 뭇 남성에게 불길 같은 질투를 불러일으키려는 속셈이었다. 오호, 가시 장미에 핀 이 놀라운 시의 역설이라니!
1962년 경북 영덕 출생. 대구에서 성장.
1994년『문학세계』 ‘시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7년 제 1시집 『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 출간
2002년 제 2시집 『구멍』 출간
2004년 제 3시집 『처녀와 바다』 출간
2007년 동시집 『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 출간
2011년 시 에세이집 『시, 낭송의 옷을 입다』 출간
2014년 평론집 『시에 미치다』 출간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2016년 제 4시집 『깍지』 출간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동시당선
2017년 동시집 『태양 셰프』 출간
2018년 시 대담 평론집 『저녁의 詩』 편저
2018년 대구문학상, 최치원문학상 대상 수상.
2020년 시선집 『고흐의 시』 출간
계간지 『문장21』 봄호 평론 당선
한국시인협회, 대구시인협회 부회장. 대구문인협회시분과위원장. 『텃밭시인학교』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