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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금요칼럼] 꽃을 읽다

고향신문 기자 입력 2025.07.18 10:10 수정 2025.07.18 10:11

최 정 연 칼럼위원

아우라(Aura)라는 말이 있다. 아우라는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산들바람의 여신이다. 사람이나 물체에서 발산되는 기운, 매력을 의미한다. 숲의 시선으로 사물을 응시할 때 지극히 주관적인 나의 눈에 비친 식물은 삶의 아우라를 은근히 발산해주는 예배당 종소리 같은 것이었다. 대문호 세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에는 로즈마리는 추억을 위한 것. 기도하고, 사랑하고, 회상하라는 문구가 있다. 또한 세익스피어 작품 도처에 허브식물들이 오묘하게 등장한다. 그는 로즈마리 향기를 읽으며 작품 속 등장인물의 기억을 매력적으로 상징화시킨 것인지 모르겠다.
 

각설하고 연속되는 폭염으로 불면증을 호소하는 이들이 부쩍 많아졌다. 낮과 밤이 모두 뜨거워 여름 숲으로 가자는 요청이 들어와도 내 몸이 먼저 우려가 된다. 심한 어지럼증과 두통이 밤새 동반되어 어느 날 급진단을 받아보니 열사병이라는 것이다. 당황스럽기까지 했으나 한 며칠 집중적으로 농장 허브식물 식재로 뜨겁게 시달린 걸 떠올리니 그럴만했다는 짐작이 든다.
 

찾아가는 체험수업을 하다 보면 이번 산불로 집을 잃거나 가족을 떠나보낸 상실의 아픔을 등짐처럼 지고 생활하는 지역민을 눈앞에서 자주 직면하게 된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심리적 박탈감에 허덕이고 있는 것이 역력했다. 동병상련의 짠함으로 서로 침묵하며 무언의 위로를 전할 뿐이다. 희망을 가지고 힘내자는 말은 폐허 속에서 비틀거리는 이에게 얼마나 부질없이 들리겠는가.
 

한동안 불면증과 씨름하며 심리적 상실감에 빠져 허브차를 자주 마셨다. 신체적 활동을 동반하며 심리적 치유가 필요한 지점에서 내가 이런 저런 이유의 체험 소재로 꼽는 라벤다와 로즈마리에는 정신을 차분하게 만드는 신경전달 물질이 분비된다. 특히 라벤더 향기의 주성분인 아세트산리날릴, 리날올, 피넨, 리모넨, 게라니올, 시네올 등은 신경을 안정시켜주고 스트레스 해소 및 불면증 예방에 탁월한 효능이 있어 주변 사람에게 허브차를 자주 권하기도 한다. 두 식물을 통해 얻게 되는 기대효과는 대중적으로도 이미 널리 알려진 정보이기도 하지만 치유활동 프로그램에서 대상자의 공감대로 작용함은 물론이고 식물인문학적 대상으로 접근하기에 내게는 진정한 효자 식물인 것이다.
 

식물매개 치유를 핑계 삼아 내가 풀꽃을 들고 사람을 만나기 시작한지 벌써 5년이 되었다. 영덕에 정착하여 공부하고 준비한 기간까지 따지면 허무맹랑한 꽃 장사는 아니 되고 싶다. 또한 식물 석박사를 할 깜냥은 절대 못되겠고 나는 꽃을 읽으며 한때 치열했던 시간을 기억해내느라 가끔 잡초밭에서 무명의 시를 짓기도 한다. 이제 시 나부랭이보다 더 흥미로운 일을 찾아 흔하디 흔한 풀꽃을 뽑아 들고 들판을 달리면 내가 산들바람처럼 살아나는 것 같아 고단한 일감에 더 즐기고 마는 것이다.
 

황무지 농장을 둘러보니 지난 산불이 훑고 지나간 잿더미를 뚫고 염치 좋게 쑥쑥 자라는 잡초가 지천이다. 저 왕성한 잡초의 기본기를 알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잡초는 친절하게도 산불에 훼손된 토양을 기름지게 만들고 잿빛 터의 무늬를 초록으로 물들게 해준다. 회복력이 뛰어난 잡초는 꽃처럼 향기롭고 서정을 품고 있다.
 

누군가 말한다. 뻗어야 할 자리가 아닌데 다리 뻗고 뭉개면 잡초가 되고 마는 세상, 타고난 자질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잡초로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타고 난 자신만의 아름다운 자질을 맘껏 펼칠 날들에 들풀 같은 세상이 필요할 것이다. 새로 싹을 올린 향기를 향해 기도하고, 사랑하고, 회상하기를. 황폐한 바다숲 온 산하가 허브로 장식될 날을 감히 상상해본다. 맨발 아래 잡초가 꿈틀,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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