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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문헌은 각각 성격이 뚜렷하다. 『교남공적』은 동학도들을 심문한 기록으로, 오늘날의 조사보고서에 해당한다. 취조관이 죄인을 앞에 두고 문답으로 추궁한 기록문이다. 『영해부적변문축』은 3월 11일부터 약 6개월간 영해부가 인근 고을과 중앙정부와 주고받은 명령문과 보고서를 모은 문서로, 일종의 관군 진압 작전 기록이다. 『신미아변시일기』는 당시 사태를 향중(鄕中)에서 유생들이 기록한 일기로, 민중과 관권, 사대부 간의 긴장을 복합으로 담고 있다.
이들 문헌은 사건 직후 작성된 1차 사료로서 진정성이 높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과 한국국학진흥원 등에 소장되어 보존 상태 또한 양호하다. 이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기준인 진정성, 역사적 가치, 보존 가능성을 모두 충족한다.
아시다시피 『영해동학혁명』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보다 23년 앞선 1871년 3월 10일(음력) 밤, 동학 지도자 최시형, 이필제, 강수, 박사헌, 전의철, 남두병 등의 주도로 전국 16개 지역에서 모인 동학도 600여 명이 탐관오리 영해부사 이정을 처단하고 관권의 가렴주구에 항거한 사건이다. 최근 학계는 이 사건을 『1871영해동학혁명』으로 명명하며, 한국사 최초의 동학 주도 민중 항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 혁명은 조선 철종 시대 최대 규모의 민중 봉기로, 자발적 참여와 다수의 희생이 있었던 동학 최초의 무장 저항이다. 이는 유교적 질서와 관권에 맞선 민중 주권 실현의 시초이자, 한국 근대 민중운동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도올 김용옥은 이를 두고 『영해는 한국 근대의 시발지』라 평가했다.
이미 1894년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물은 2023년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집행이사회에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바 있다. 당시 등재된 자료는 동학군 일기, 회고록, 유생 문집, 정부 보고서, 전봉준의 진술문, 최시형의 임명장 등 185건으로, 동학사상의 인권·자유·평등 정신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사례다. 최근 유네스코는 민주화운동과 재난의 기록 등 공동체의 고통과 저항의 기억에도 주목하고 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세월호 참사 보도기록 등이 그 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교남공적』 등 영해동학혁명 기록물도 단순한 지역 사건 문서가 아니라, 동학사상의 확산, 민중의 정치적 각성, 근대 시민의식의 태동, 여성의 참여, 인권 탄압의 실상을 담은 자료로서 세계사적 가치를 지닌다.
이제 『1871영해동학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지자체, 학계, 시민사회가 힘을 모아 이들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본격으로 추진할 때다.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을 지킬 때, 세계도 그 의미에 공감할 것이다.
끝으로, 당시 혁명에 참여하거나 희생된 동학도들은 아직도 『역적』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체포, 고문, 효수, 능지처사, 전투 중 사망 등으로 목숨을 잃은 이들이 90여 명, 유배와 중형을 받은 이들도 20여 명에 달한다. 당시 1871년 조선 단일 사건으로는 최대 규모의 민중 희생이었다. 154년이 지난 지금, 이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은 동학 정신을 계승하는 길이며, 시민사회와 종교계가 함께 나서야 할 시대적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