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more
오피니언 칼럼

[금요칼럼] 의병장 신돌석 장군을 만나다

고향신문 기자 입력 2025.06.20 09:49 수정 2025.06.20 09:51

김 인 현 교수(고려대법학전문대학원, 영해중고 총동창회 직전 회장)

지난 14일, 고향 영덕에서 의병장 신돌석 장군에게서 배울 교훈에 대한 강의를 의뢰받아 조금 연구를 했다. 몇가지 의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것이 영덕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의견을 제시한다.
 

신돌석 장군은 평민의병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축산면 도곡2리에서 태어나 30세로 생을 마감했다. 1906년에서 1908년까지 영릉의진을 일으켜 일본군의 침략에 대항했다. 신돌석 장군은 2년 8개월 동안 의병활동을 했고 우리 역사에 높이 평가되고 있다.
 

첫째, 신돌석 장군은 평민의병장으로 알려져 있다. 윗대 조상들이 아전이었기 때문에 평민이라기보다는 중인에 가깝다. 1894년 갑오경장이 일어나면서 신분제가 폐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반, 중인, 평민, 그리고 천민이라는 신분은 여전히 공고했을 것이다. 양반이 중심이 되었던 당시 의병장 중에서는 유일한 평민 출신이다. 그의 영릉의진에도 양반이 상당수 존재했다. 그는 진성이씨 집안에서 공부를 배웠고 도움을 받았다. 평민의병장으로서 양반의 협조를 받으면서 의병활동을 잘 진행한 것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둘째, 2년 8개월 동안 게릴라전을 펼쳤다는 것이다. 정규군이 아니라 의병이기 때문에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지원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년 8개월을 활동한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영덕과 영해지역에서 보급을 받아서 울진과 장호원 등 동해안 어업전진 기지를 공격하는 일을 했다. 지역에서 음성적으로 충분한 식량 등 보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역에서의 음성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긴 기간 동안의 산악에서의 의병활동은 불가했다는 점에서 유효한 보급은 의병활동의 중요한 전제가 된다. 의병활동에 필요한 보급품의 공급에 영덕이나 인근 군민들이 노력한 사실들이 밝혀지고 평가받아야 한다.
 

신돌석 장군의 정신을 계승하고 영덕의 발전에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영덕은 어느 지역보다 호국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 조선시대, 대한민국에 걸쳐서 호국의 사실들이 역사적으로 증명되고 남아있다. 1382년 일본의 왜적들이 축산도를 통해서 동해안을 쳐들어와서 큰 피해를 입었다. 고려 조정은 영해성과 축산성을 쌓도록 했다. 그 뒤로 축산성에 수군 만호를 두어 왜구의 침입을 막았다. 봉화산의 봉화대와 축산성과 영해성은 성터가 지금도 남아있다. 세종 대의 최윤덕 장군도 도곡에서 왜구를 무찔렀다는 기록이 필원잡기에 나온다. 임진왜란 때 무의공 박의장이 수류탄을 만들어 경주성 싸움에서 승리했다. 불천위 제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신규년도 조정으로부터 인정받았다. 고종실록에 기록이 나온다. 6.25때에는 장사상륙작전이 유명하고 지금도 문산호가 영덕이 호국의 성지임을 알려준다. 이런 6곳의 유적을 호국의 벨트로 만들어가자.
 

강의 후 신돌석 장군 생가를 방문했다. 생가가 있는 도곡2리는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야외에서 행사를 하기에 충분했다. 신돌석 장군과 영릉의병에 대한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는 학술대회와 백일장 행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신돌석 장군에 대한 학술대회를 한 다음에 밤에 백일장을 한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에는 축산만호성 터, 봉수대 등 호국벨트를 구경하는 등 영덕관광을 하면 될 것이다. 의외로 신돌석 장군에 대한 기록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저작권자 고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