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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 3·18운동을 이끄신 기독교 지도자들...김우일 목사·김세영 목사·박희락 장로·정규하 장로·강우근 목사·김호근 장로·권태원 정위(구세군 장로) |
군내 각처로 만세의거가 확산되었다. 특히 만세의거 시발지인 영해에서는 의거에 참여하는 군중들의 숫자가 많아지자 일제는 순사 주제소를 비롯하여 일본 헌병과 경찰들이 먼저 공포탄을 쏘아 군중을 해산하고자 하였으나 군중들은 도리어 만세를 크게 외치며 이들이 쏘는 공포탄에 조금도 겁을 먹지 않고 오히려 격렬하게 일본 경찰을 압박했다.
그러자 일본 경찰은 무차별 실탄사격을 시작했다. 결국 비무장 시위대는 이들이 쏘는 총탄에 의하여 순식간에 8명이 사망하였고 16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와 같은 영해 3·18만세 의거는 김세영, 권태원, 정규하 강우근 박희락을 대표로 하는 기독교 계열과 남세혁을 대표로 하는 유림 중심의 계열, 남정면의 의거와 같은 신문이나 소식을 듣고 자발적으로 의거를 일으킨 계열로 나눌 수 있다.
영덕과 영해지역 외 군내 전체에서 3·18만세운동 의거와 관련하여 600여명의 시위 참가자가 검거되어 이중 170명이 재판을 받았다. 재판이 너무 많아서 1, 2차로 나누어 재판을 받았다고 한다. 1차 재판에는 김세영을 비롯하여 96명이 재판을 받았으며, 2차 재판에는 강봉조, 강삼인을 포함하여 74명이 재판을 받았다.
이들이 받은 죄목은 공무집행 방해죄를 비롯하여 5~6가지의 죄명으로 최고 7년형에서 1년 이상자가 약 150여 명이며 태형 90대의 매를 맞은 사람이 12명이나 된다. 영해 3·18운동 기념탑에 의하면 영해의 유림과 기독교인들이 합심하여 거사를 이루었다는 비문이 있다.
실상은 당시 영덕지역의 연합체로서는 신앙 공동체 뿐이었다. 조직된 단체는 기독교가 가장 강한 단체였으며 기독교 신앙인들의 '형제사랑 이웃사랑 나라사랑'의 기독교 정신으로 단합된 힘이 나라를 살리는 독립만세운동에 앞장서던 것이다.
* 여러 일화가 전해지고 있으나 지면 관계로 추후에 기회가 되면 소개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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