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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고

“정조의 개혁정치와 현대정치사상의 비교”

고향신문 기자 입력 2021.01.18 16:40 수정 2021.01.18 16:43

박 재 암(달산, 영덕중59년기)    
서울공대 졸업, 서울도시가스상무이사 

물론 220년 전의 정치이지만 조선조 22대 정조대왕의 제위는 1776년 ∼ 1800년 노론의 집권기간이다. 정조의 부친 사도세자의 죽음도 노론들의 영향에 의한 사건으로 보면 된다. 

그 당시의 정조의 나이는 11세 나이로 죽은 큰아버지 효장세자에 입양됐다. 

세손시절 정조는 항상 외로움으로 때로는 생명의 위험까지 느끼는 사건들이 수시로 발생했다. 한 때는 정조가 살고 있던 궁궐에 자객 들의 침투가 발생하였지만 그러나 정조는 즉위 후에 주동자 몇 명만 처단하고 다른 보복은 하지 않았다. 만약 정조가 보복하였다면 정조 때 개혁정치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러나 정조개혁의 일부문인 화성축조에 대하여 알아보자. 

정조는 화성축조에 대하여 설계는 실학자 다산 정약용에 의해 완성되었는데 중국, 일본의 성곽축조의 장점을 채택했다.

설계 후 공사기간은 10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 되었으나 실질적인 기간은 2년 반으로 단축시켰다. 정조는 화성축조의 공사를 종전에 사용해오든 부역제를 하지 않고 임금을 지급하고 도급제를 시행하여 부실공사를 막기 위해 실명제를 하였다. 그때 그 시절에 220년 후의 시공방법으로 공기를 단축하여 튼튼한 미래지향적인 축조를 건설하였다. 

 

그 때 공사보고서 ‘화성성역의제’에 의하면 어느 공사는 누가 감독했으며, 시공자는 누구이며, 각부서의 공사자재비는 얼마나 들어갔으며, 지푸라기 하나 빼 놓지 않고 상세하게 기록 돼있었다. 

지금 화성축조는 글로벌이 놀라울 정도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있다.  

또한 정조는 공사 중 하천을 막아 만석거 라는 큰 저수지를 만들고 부근에 있는 황무지를 개간하여 대유둔을 만들어 농토 없는 백성들에게 소 한 마리와 함께 무상 분배하여 농사를 일구도록 하였다. 생산량은 농민들과 나누고 국가 몫은 수원주둔 양용명의 군비에 사용하였다. 

수원은 물이 풍부하여 이앙 법까지 사용하여 큰 수확량을 올렸다. 

이앙 법은 조선 내내 못자리와 이앙시기에 가뭄이 자주 발생하여 금지돼 있었으나 정조의 농민 활성화정책은 사뭇 달랐다. 

정조의 이앙 법에 힘을 실어 황해도에서도 저수지를 만들고 황무지 개간 등으로 농업생산성향상으로 농민들의 사기는 하늘 까지 치솟았다.

또한 정조는 수원 팔달문 부근에 전국 상인들을 모이게 하여 돈 6만 냥을 무이자로 빌려줬든 곳이 현재 활성화된 수원남문시장이다. 정조의 농업발전으로 국민들이 원하던 상업병행발전으로 국가의 위상은 한층 올라섰다. 

 

현재의 역사학자들도 조선조 정조가 5 ∼ 10년을 더 살았으면 조선은 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하는 학자들이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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